지난 줄거리 - 와인을 잘 몰라 스트레스를 받던 정유진은 소믈리에로 일하는 고교 동창 김은정에게 연락해 매주 한 차례 과외를 받기로 한다. 첫날, 라벨에 품종, 빈티지 등 다양한 정보가 적힌 것을 배운 정유진은 문익점 처럼 포도 접수를 밀수해 탄생한 ‘장 레옹’, 돔 페리뇽 수사가 코르크 마개를 발명해 만들어진 샴페인 ‘모엣 샹동’, 이탈리아 공작이 오크통에 ‘공작이 찜했음’이라고 적은 데서 유래한 ‘두깔레 리제르바’에 대해 차례로 배운다. 백년 전쟁이 와인 때문에 일어난 사실에는 깜짝 놀란다.
여섯번째 와인 과외날, 김은정이 ‘1865 리제르바 말벡(Reserva Malbec)’이라는 와인을 주문한다. 숫자로 된 와인은 처음 보는데 특이하다. 검은색 병에 회색으로 쓰인 ‘1865’라는 숫자와 그 아래 빨간 띠가 인상적이다.
과연 맛은 어떨까. 라즈베리 향이 먼저 코를 자극한 뒤 목을 타고 내려간 붉은 액체는 다시 향으로 발산해 뇌로 역류하는 느낌이다. 맛과 향은 독특하면서 강렬하다. 이게 무슨 느낌이더라.
“어때? 이건 ‘말벡’이라는 품종으로 만든 건데 가죽을 혀로 핥았을 때 나는 맛이 느껴지지 않니. 라즈베리와 블랙베리 안에 숨겨진 가죽과 오크향이 뒷맛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지.”
그 말을 듣고 보니 알 듯 말 듯 한 그 향은 바로 가죽이었다. 미디엄 바디와 풀 바디의 중간쯤 느껴지는 농밀한 액체 속에 가죽향이 뒷맛을 길게 만들며 오묘한 자극을 준 것 같다.
“그런데 ‘1865’라는 숫자가 주는 의미가 궁금하지 않아?”
그렇다. 왜 숫자가 붙어 있을까. “응. 무슨 뜻이야?”
“‘1865’는 골프에서 18홀을 65타에 치라는 의미야. 몇 년 전 국내 최고의 CC로 통하는 안양 베네스트에서 CEO들이 18홀에 65타를 치자며 행운의 뜻으로 이 와인을 권해 마시기 시작했는데 이후 자연스럽게 ‘골프 와인’으로 통하게 됐지.”
“그럼 골퍼들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와인이라는 거야?”
“히히. 그건 아니야. 이 와인은 칠레 산 페드로라는 회사에서 만든 건데, ‘1865’는 사실 산 페드로의 설립 연도를 말하는 거야. 그런데 국내에서 ‘골프 와인’으로 자리 잡은 거지. 공을 잘 치고 싶은 CEO들에게 일종의 부적이 됐다고나 할까. 이 덕에 전 세계를 통틀어 우리나라가 ‘1865’ 최대 소비국이 됐어.”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기를 전에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해.”
“그럼 한 가지 더 얘기 해줄까. 이건 수불석권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한 와인 애호가가 네이버 와인카페에 올려 화제를 모은 얘기인데, 고가 와인을 소장한 와인 애호가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그랑크뤼 와인은 그냥 나누고 ‘1865’만 갖고 갔데. 며칠 후 도둑이 와인을 팔려고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경찰에 잡혔는데 뭐라고 했는지 알아? ‘와인이 오래될수록 비싼 거 다 아시죠? 이 와인은 무려 150년이 다되어 갑니다. 1865년에 나온 거니까요. 정말 저렴한 가격 100만원에 판매하겠습니다.’라고 했데.”
하하하. 정말 웃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빈티지를 김은정한테 배우지 않았으면 나도 ‘1865’가 와인명이 아니라 빈티지라고 착각하지 않았을까.
이길상 기자 juna109@donga.com
한국국제소믈리에협회 KISA 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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