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남을 위해 봉사 한번 안 해 본 사람은 드물다.
지하철역에서 무거운 짐 들고 가는 할머니를 도와드린 일, 수해지역 주민을 돕기 위해 한 통에 1000원짜리 전화를 건 일, 장애인의 목욕수발을 든 일.
대학입시에서 봉사활동이 중요한 평가기준이 되고 기업에선 사회공헌활동을 중요한 프로그램으로 운영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이들의 봉사는 남다르다.
누가 보더라도 봉사를 하기보다는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한 달에 채 50만 원이 되지 않는 정부지원비로 기초생활을 하는 장애인, 연 수입 300만 원에 불과한 가난한 무명배우, 이삿짐을 나르고 경비를 서면서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그 주인공이다. 봉사, 해 본 사람들은 안다.
마음은 있어도 찾아 나서기 쉽지 않고 한 번 하기는 쉬워도 지속적으로 하기는 어렵다.
더구나 내 생활에 여유가 없을 때는 돈도 시간도 내놓기 힘들다.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생활 속 봉사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가정의 달’인 5월, 이웃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 아름다운 가정의 달 ♥
도움 받아야 할 사람들이 되레 남 돕기 중독된 사연
○ 연 소득 300만 원인 무명배우의 기부인생
박원희(33) 씨는 무명배우다. 2003년 서울예전을 졸업한 뒤 서울 대학로의 연극, 뮤지컬 무대에서 수차례 단역을 맡았고, 최근 방송되는 한 주말 드라마에서 카페주인으로 몇 번 출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다.
“주연이나 조연이 아니니까요. 저는 ‘병풍’ 같은 존재예요.”
하지만 필리핀 소녀 제싸와 인도 소녀 두가에게 그는 병풍이 아닌 ‘키다리 아저씨’다. 일이 없으면 돈도 없기에, 연 300만 원을 채 벌까 말까 한 그가 한 달에 아이당 3만5000원을 국제어린이양육기구인 한국컴패션(www.compassion.or.kr)에 기부한다. 처음에는 ‘컴패션 밴드’라는 게 있다고 해서 공연 기회를 한 번이라도 더 가져볼까 싶어 찾아왔다.
“그런데 와서 보니 이틀에 한 끼만 먹는 아이들이 세상에 너무 많은 거예요. 자라나는 아이들은 먹을 것 먹고, 입을 것 입어야 하잖아요?”
그렇다고 봉사에 나서기가 쉬웠던 건 아니다. 고정 수입도 없는데 다만 몇 만 원이지만 매달 꼬박꼬박 내야 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그러다 지난해 5월 있었던 한국컴패션이 후원한 사진전이 계기가 됐다. 개발도상국 아이들의 가난한 일상을 담은 이 사진전에서는 후원할 아이들의 사진을 나뭇잎처럼 달아놓은 ‘러브 트리’를 내놓는다. 참관자들이 직접 후원할 아동을 선택하라는 것이다. 박 씨는 며칠이 지나도 러브 트리에 남아 있던 눈에 화상 자국이 있는 필리핀 아이에게 자꾸 시선이 갔다.
“제가 어릴 때 살던 동네의 주소가 ‘산 ××번지’였어요. 달동네 방 한 칸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형, 저, 이혼한 삼촌의 아이 2명까지 함께 살았죠. 그래도 우린 밥은 굶지 않았거든요.”
글=하임숙 기자 artemes@donga.com
사진=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지면 디자인=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가진 것 적지만 베푸니까 행복해요
■도움 받아야 할 사람들이 되레 남 돕기 중독된 사연
시작이 어려웠을 뿐이다. 6월 후원아동을 한 명 더 늘렸다. 개도국 아이들은 후원자가 중간에 바뀔 때 상처를 받는다. 돈만 아니라 정도 나누기 때문이다. 박 씨는 후원을 계속하기 위해 최근 사설 헬스트레이너로 나섰다.
뮤지컬 배우를 하기 위해 발레, 한국무용, 재즈댄스 등을 배운 실력을 발휘해 친한 사람 3명에게 한 달에 10만 원을 받고 ‘몸 만드는 법’을 가르친다.
“예전에는 유명해져서 돈 많이 버는 연예인이 되는 게 목표였는데 요즘은 바뀌었어요. 실력 있는 배우가 되는 것으로요. 그럼 적어도 돈은 계속 벌 테고 후원도 할 수 있잖아요.”
○ 남편은 손발이, 아내는 눈이 된 봉사
그들은 장애인 부부다. 남편은 어려서 뇌성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하다. 1m 앞 사물이 잘 보이지 않는 2급 중복지체장애인, 아내는 1급 정신지체장애인이다.
인천시 부평구 부평2동에 사는 김지태(46) 민경분(36) 부부는 인근에 사는 7집의 독거노인에게 아침마다 도시락, 야채, 생필품을 배달한다.
김 씨는 한 손엔 배달 물품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민 씨의 손을 잡는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남편을 위해 아내가 눈이 돼 주는 것이다.
물론 돈은 받지 않는다. 물건은 KT&G복지재단(www.ktngwelfare.org), 품앗이복지후원회 등에서 받아온다. 이웃의 중증장애인이 이사를 가면 짐을 나르는 것도 김 씨 몫이다.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 술로 소일하고 세상이 싫었어요. 플라스틱을 가공하는 공장 등에서 일했는데 장애인이라 푸대접을 받다보니 원망이 많았죠.”
김 씨는 자살 시도를 세 번이나 했다. 방황 끝에 3년 전 아내를 만났고 비록 정신지체 장애인이지만 마음이 맑은 아내와 함께 봉사하는 삶을 살기로 마음을 바꿨다. 마음을 바꾸자 세상도 바뀌었다.
처음에는 품앗이라는 단체가 기반이 됐다. 회원으로 등록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남는 생활용품, 중고가전, 의류, 식품을 모아서 나눠주는 비영리단체를 우연히 알게 됐다. 회원으로 등록해 생활용품 등을 받다보니 회원들에게 물품을 배달하고 싶어졌다. 열심히 활동을 해도 시간이 남았다. 동사무소를 찾아가 추가로 봉사활동 할 곳을 수소문했다. 이렇게 해서 김 씨는 여러 복지재단의 숨은 일꾼이 됐다.
“처음에는 어르신들이 싫어하시더군요. 장애인이, 못사는 사람이 갖다 주니까 혹 먹다 남은 것 주지 않느냐는 눈치였어요.”
사정을 모르는 노인들은 손을 잡고 다니는 젊은 부부에게 ‘어른들 앞에서 남부끄러운 짓 한다’며 야단쳤다.
그래도 부부는 2년째 봉사를 다닌다. 봉사는 받은 만큼 베풀어야 한다는 게 부부의 생각이다.
“이삿짐을 나르거나 날씨 궂을 때 배달을 다니면 힘들죠. ‘아이고, 이거 때려치워야지’ 싶다가도 이삿짐을 나른 뒤 장애인이 고마워하며 웃거나 도시락을 배달받은 노인이 손 한 번 잡아주면 피곤이 사라지죠. 이건 뭐, 중독 같아요.”
○ 노동으로 번 돈으로 개도국 아동 지원
오만탁(57) 씨는 3월부터 충북 음성군의 한 음료수 공장의 경비 일을 한다. 그 전에는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서 이삿짐을 날랐다. 그는 2002년 9월부터 유엔 산하단체로 빈곤국 어린이들을 후원하는 플랜코리아(www.plankorea.or.kr)를 통해 한 달에 5만 원씩 베트남 소녀 느구엔 티 키에우 반(16)을 후원하고 있다.
“1967년 육군 군수사령부에 근무할 때 파월장병들이 전쟁터로 나가는 광경을 생생히 봤지요. 이후 미군을 따라 한국군도 베트남에서 철수했지만 그들이 뿌린 씨앗은 ‘라이따이한’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잖아요. 이상하게 그게 마음에 걸리데요.”
처음 후원을 시작했을 때 오 씨 사정은 괜찮은 편이었다. 인천과 서울에 작지만 집을 한 채씩 갖고 있었고 동생과 함께 이삿짐센터를 운영하면서 수입도 쏠쏠했다.
하지만 몇 번의 수해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공릉동 일대 주민들은 중랑천 둑이 터지면서 집들이 물에 잠기자 서울시를 상대로 피해보상소송을 냈고 소송은 2004년 10월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오지랖이 넓었던 오 씨는 피해대책위원장을 맡아 주민들의 소송비용을 빌려주기도 했다가 돈과 집을 대부분 날렸다.
마이너스 통장으로 연명하는 생활을 해도 한 번 시작한 후원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이삿짐을 한 번 나르면 6만∼7만 원은 버니까 느구엔에게 돈을 부치려고 한 달에 한두 번씩 일을 다녔어요.”
무엇이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도 후원을 독려하는 것일까.
“새마을운동 이전에 살아본 우리 세대 사람들은 알 겁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비참한 상황이 어떤지를.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그때 한국과 마찬가지예요.”
앞으로 사정이 더 나빠지면 어떻게 될까.
“제가 다부지고 건강한 체질이라 적어도 10년은 더 일할 수 있어요. 사정이 더 나빠지면 그때 최선을 다해 다른 일을 찾아봐야죠.”
○ 정부지원금의 1%를 기부하는 생활보호대상자
생활보호대상자가 정부지원금 중 1%를 매달 기부하기도 한다. 서울 중랑구 면목동의 한윤학(56) 씨다.
35세에 뇌중풍(뇌졸중)으로 하반신이 마비된 한 씨는 2000년부터 매달 한 차례 종로구 가회동 아름다운재단(www.beautifulfund.org)으로 찾아와 월수입 23만 원의 1%인 2300원을 소외된 계층을 돕기 위해 기부한다. 전동휠체어에 앉은 채 생활하는 한 씨는 밥 해먹고, 옷과 이불을 빠는 일도 스스로 다 한다.
“다 늙은 장애인이라 옷 사 입을 생각도 없고, 병원비도 거의 공짜라 생활비가 거의 들지 않아요.”
그에게는 충남 논산시에 사는 딸 부부와 손자들이 있다. 차라리 기부할 돈으로 일 년에 몇 번 못 보는 손자들에게 장난감이라도 사주는 게 더 행복하지 않을까.
어린이날에 만나지 못한 손자들을 만나러 10일 논산으로 내려가는 한 씨는 손자들에게 자장면을 사주기로 약속했다고 했다.
그 자장면의 행복만큼이나 기부할 때의 행복이 크다는 설명이다.
“기부하면 진짜 기분이 좋아져요. 많은 돈을 기부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저는 ‘새발의 피’죠. 그 돈으로 이런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니까 제가 고맙네요.”
하임숙 기자 arteme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