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는 누가 하고, 빨래는 누가 하란 말이냐. 애들은 누가 보고….”
미국 의회가 시끌시끌했다. 매사추세츠 주 하원의원인 이디스 로저스가 제출한 법안이 문제였다.
여성이 비전투원으로 근무하도록 허용하는 육군 여성지원단(WAAC) 창설을 놓고 격론이 오갔다. 1941년 5월이었다.
로저스는 뉴잉글랜드(북동부 대서양 연안의 6개 주) 최초의 여성의원. 육군 참모총장 조지 마셜을 만나 여군부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여성은 계약 또는 자원봉사 형태로 전화 교환원이나 영양사로 일했다. 민간인 신분이라 음식과 숙소는 스스로 해결했다. 의료나 연금 혜택도 없었다.
로저스는 여성이 남성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군은 여성을 받아들이길 꺼렸다. 타협이 불가피했다.
음식 군복 숙소 봉급 의료 혜택을 주기로 했다. 여군 장교가 남자 군인을 지휘할 수는 없었다. 일등장교(first officer)는 남자 대위에 해당하는데 월급은 남자 소위와 같았다.
해외 파견 때는 해외근무 수당, 상이군인 의료보험, 유족 연금을 받지 못했다. 포로가 돼도 제네바 협정의 적용대상이 아니었다.
여성에게 불리한 내용이 많았지만 보수적인 남부 출신 의원들은 목소리를 높였다. 여자가 군대 가면 집안일을 누가 하느냐고.
논쟁이 계속됐고 법안 통과는 불확실했다. 그러나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한 뒤 분위기가 달라졌다. 유럽과 아시아 태평양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르게 되자 군 수뇌부는 여성에게 눈을 돌렸다.
해를 넘겨 1942년 5월 14일, 하원에서 249 대 86, 상원에서 39 대 27로 법안이 통과됐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다음 날 서명하면서 WAAC 창설안이 발효됐다.
전쟁부 장관인 헨리 스팀슨은 오베타 하비를 초대 단장으로 임명했다. 텍사스 주지사를 지낸 윌리엄 하비의 아내이자 휴스턴 지역 신문의 에디터 출신이었다.
단원은 대부분 사무원, 속기사, 전화 교환원, 항공 관제사로 일했다. 남성이 전투에 전념하도록 부수적 일에서 벗어나게 하자는 게 창설 취지였으니까. 프리 어 맨 포 컴뱃!(Free a man for combat!)
WAAC는 1943년 7월 3일부터 육군 여성단(WAC)으로 이름을 바꿨다. 보조 또는 지원을 뜻하는 단어 ‘auxiliaries’도 사라졌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복무한 여군은 15만 명에 이른다. 이 중 1만6000여 명은 1980년 이후에야 재향 군인 혜택을 받았다.
송상근 기자 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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