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강원 화천군 유촌초교 마을도서관 개관 기념 글짓기대회에서 학부모 부문 장원을 한 유촌초교 졸업생 허해진 씨(가운데) 가족. 최우수상을 받은 딸 홍진형 양(5학년·오른쪽)과 아들 영표 군(3학년)도 독서광이다. 사진 제공 ‘작은 도서관 만드는 사람들’
114호 화천 유촌초등교
“내 동생 못 봤니?” “못 봤는데요.”
1984년 어느 날 오후 강원 화천군 유촌초등학교 도서실. 친구들의 거짓말에 속아 언니가 도서실 문을 닫고 나가자 당시 만 아홉 살이던 허해진 양이 책상 밑에서 몸을 일으켰다. 볕이 잘 드는 도서실은 낡은 문고본에서 풍기는 책 냄새가 가득했다. 허 양은 ‘괴도 뤼팽’ 같은 추리소설을 읽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해가 지고 나서야 집에 돌아간 적이 부지기수였다. 농사와 집안일을 거들지 않고 학교에서 늦게 온다는 어머니의 꾸중이 무서웠지만 책 읽는 재미에 흠뻑 빠진 허 양은 졸업할 때까지 도서관 숨바꼭질을 계속했다.
24년이 지나 네 아이의 어머니이자 베테랑 농사꾼이 된 허해진(33) 씨는 다시 매일 학교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게 됐다. 본보와 ‘작은 도서관 만드는 사람들’(대표 김수연), 네이버가 함께 진행하는 ‘고향 학교에 마을도서관을’ 캠페인에 따라 9일 유촌초교에 114번째 마을도서관이 개관된 것. 이날 기증받은 책 3400여 권 중 절반이 어른을 위한 책이다.
이 학교 70회 졸업생인 허 씨는 ‘책 불러오기’라는 글로 학교 마을도서관 개관 기념 글짓기 대회에서 학부모 부문 장원을 했다.
어릴 적, 책을 빌릴 수 없는 방학이 싫었다던 허 씨. 그는 개관식 전날 밤에도 아기를 재우느라 3시간밖에 못 잤지만 오전 6시부터 책을 읽을 정도로 여전한 독서광이다. 빠듯한 생활비에서 꼬박꼬박 책 살 돈을 떼놓는다는 그는 “이정명의 소설 ‘바람의 화원’이 읽고 싶었는데 이번에 마침 책이 들어왔다”며 기뻐했다.
“엄마, 3000권도 넘게 들어왔대! 졸업할 때까지 다 읽을 수 있을까?”
허 씨의 큰딸 홍진형(5학년) 양도 즐거움을 감추지 못했다. 영표(3학년)와 지민(2학년)이 등 허 씨 슬하의 4남매 가운데 세 살배기를 뺀 셋 모두가 어머니가 졸업한 유촌초교에 다닌다. 개관식 내내 입 꼬리가 귀에 걸린 진형이는 이번 대회에서 ‘책사랑’이라는 글로 최우수상을 받았다. 진형이는 “책을 많이 읽어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는 외교관이 될 것”이라고 야무진 포부를 밝혔다.
1908년 개교해 올해 100주년을 맞은 유촌초교는 20여 년 전 허 씨가 학생일 때만 해도 전교생이 300명이 넘었지만 지금은 72명에 불과하다. 젊은 층이 문화 환경이 열악한 농촌을 떠나면서 아이들도 줄었다. 당시에는 화천읍내에 세 군데나 있었던 서점도 지금은 한 곳밖에 없다.
허 씨는 “아이들이 책 한 권을 서로 보겠다며 다툴 정도로 독서를 좋아하는데 읍내 도서관에 가려면 20분 이상 버스를 타야 한다”며 학교 마을도서관 개관을 반겼다.
개관식에 참석한 최광철 화천 부군수는 축사에서 “화천군도 도서 구입에 아낌없이 지원하겠다”며 “주민들의 복지 문화 터전을 마련하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4학년 김기성 군은 ‘도서관은 지식 상자’라는 동시로 장려상을 받았다.
“우리학교 도서관//농사일 끝마치고/도서관을 찾는 어른들로/시끌벅적해지겠지//온 가족이 한데 모여/오순도순 책 읽어주는/똑똑한 우리 마을 되겠지.”
화천=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