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월 16일 새벽 해병 제1여단과 2개 공수부대를 선봉 세력으로 삼은 혁명부대는 수도 서울 일원을 완전히 점령하여 모든 지배권을 장악했다. 집권 9개월째 되는 장면 정부를 불신임하는 이 군부 쿠데타 때문에 3부의 기능은 일체 마비돼 버렸으며 군사혁명위원회 포고에 따라 금융기관도 일체 동결, 문을 닫은 채 삼엄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1961년 5월 16일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
5·16군사정변을 주도한 장도영 중장과 박정희 소장, 김윤근 준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발족하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또 이날 오전 9시를 기해 국내 전 금융기관의 금융거래를 일체 동결했다. 모든 물가를 군사정변 직전인 5월 15일 수준으로 묶어두는 물가억제령도 발동했다. 특히 매점매석을 엄격히 금지하고 위반자는 ‘극형(極刑)에 처한다’고 못 박았다.
재산 해외도피자와 밀수자 역시 극형 대상이었다. 외래사치품 사용을 엄금했고 노임은 5월 15일 수준으로 유지했다. 노동쟁의 또한 금지 대상이었다.
서울 남대문시장에선 15일까지만 해도 가마당 1만9800환 하던 쌀값이 하루 만에 2만1500환까지 치솟았다. 군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상인들이 매점매석에 가세한 데다 시민들의 불안감마저 더해졌기 때문이다.
군사정변 3일 뒤인 18일 쌀 한 가마 값은 2만2000환에 거래됐다. 서울 시내 쌀 상인들은 쌀값이 진정세를 보이지 않자 도매시세를 가마당 2만 환으로 동결한다고 결의했다. 자율결의 형식을 빌렸지만 군사혁명위원회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었다.
군부세력이 들고 일어난 데는 당시 정치 경제 사회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있었지만 장면 내각의 경제정책 실정(失政)과도 연관이 있었다. 1960년 4·19혁명 직후는 휴전 이래 최대의 불경기로 불릴 정도로 경기가 안 좋았다. 철도 운임과 전기 요금, 쌀값이 급등해 서민은 궁핍한 생활에 시달렸고 생산비용이 증가해 기업들은 경영하기가 어렵다고 아우성이었다.
군부는 “경제를 정상화해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았다. 북한 경제를 압도할 수 있는 경제 번영을 먼저 이뤄내야 반공(反共)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군사정변 직후 매점매석하는 사람을 가차 없이 극형에 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혁명의 명분인 민생안정과 경제번영을 이루기 위해선 기초적인 먹을거리인 쌀값을 잡지 않고선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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