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범한 지 석 달도 채 안 된 이명박 정부가 3년도 더 된 정부같이 느껴진다. 많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한다. 너무 일찍 찾아온 ‘이명박 피로감’이다. 대통령 지지율이 20%대로 떨어져서가 아니다. ‘섬김의 정부’가 ‘소통의 정부’로 구호를 바꿔서도 아니다. 졸속 협상, 부실 협상이라는 미국 쇠고기 파동 탓만도 아닐 듯싶다. 그러면 무엇 때문일까? 대통령의 인사 실패와 우파 아마추어정부의 갈팡질팡, 여당의 내부 분열, 국민의 조급한 기대와 실망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이 급속한 반전(反轉)을 단숨에 읽어내기란 쉽지 않다.
‘익숙한 것들’과 결별해야
이 대통령은 엊그제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내가 먼저 바뀌겠다”고 했다. “(그동안) 국민과 역사 앞에 교만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면서 더 낮고 낮은 자세로 국민을 섬기고 국민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대통령의 진정성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스스로 바꾼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바뀌려면 무엇보다 지난날에 익숙했던 것들과 결별(訣別)해야 한다. 최고경영자(CEO)형 리더십, 좀 더 명확하게는 ‘정주영(鄭周永)식 리더십’과 결별해야 한다. 정 회장이 한국 산업화에 기여한 공로를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국가는 기업이 아니다. 하물며 지금은 ‘박정희-정주영 시대’가 아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이명박 정부에서는 ‘이명박 혼자 뛰었다’(그렇게 국민 눈에 비쳤다). 총리는 있는지 없는지 모를 지경이었고, 장관들도 대통령이 나서기 전에는 움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대통령이 한 말씀 하면 잽싸게 복창(復唱)했다. 대통령이 국민건강에 위협을 가하는 일이 있다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우선적으로 중단하겠다고 하자, 그동안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생해도 국제수역사무국이 광우병 통제지위를 낮추지 않으면 수입을 중단할 수 없다던 장관이 말을 바꾸고, 총리가 대(對)국민담화를 하는 등 뒷북을 친 것이 생생한 사례다. 이래선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기 어렵다.
국정철학을 바로 세워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창조적 실용주의를 내세운다. 그러나 무엇이 창조적 실용인지 국민은 잘 알지 못한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을 부정하는 것이 이 정부의 실용주의인가 하는 정도다. 문제는 반(反) 이후 합(合)으로서의 창조적 가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전 정권에서 임명된 기관장들을 일괄적으로 몰아내는 것이 성장과 통합을 위한 실용주의적 접근인가. 말과 행위가 다르면 국민의 동의를 구할 수 없다.
전 정권의 이념 과잉(過剩)에 넌더리가 난 국민에게 행위와 실천을 강조하는 실용정부는 시대적 요구일 수 있다. 하지만 실용주의는 유용성(有用性)의 기준이 모호만 만큼 자칫 원칙 없는 편의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 미국의 실용주의가 뿌리내릴 수 있었던 것은 엄격한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행위 주체의 도덕성이 담보되지 못하는 실용주의는 성공하기 어렵다. 청와대와 내각의 ‘부자 클럽’이 국민 일반과 소통하기 어려운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 결과가 급격한 민심 이반(離反)이라면 지나친 논리인가.
대통령의 언어는 절제되고 사려 깊어야 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전면 개방키로 한 직후 이 대통령은 “일반 시민들이 값싸고 질 좋은 고기를 먹게 됐다”고 했다. 설령 광우병에 대한 국민의 우려를 미처 알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타격을 받을 국내 축산 농가를 배려한다면 삼가야 할 말이었다. 광우병 파동과 관련된 책임자 문책 여부에 대해선 “이번에 세게 훈련했는데 뭘 또 바꾸나. 바꾸면 또 새로 훈련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 또한 사안의 중요성에 비추어 적절치 않은 말이다. 자질이 못 미치는 인물은 미리 퇴출시키는 편이 낫다. 청와대와 내각이 프로야구 2군은 아니잖은가.
전직 대통령이 부적한 말로 국민의 원성을 산 것을 잘 알고 있을 현직 대통령이 자신의 발언에 그토록 무감각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진정 국민을 섬기고 국민과 소통하려 한다면 말부터 조심해야 한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이 대통령은 학습능력이 뛰어나다고 한다. 실패에서 학습효과를 얻는다면 임기 초반의 홍역(紅疫)은 액땜이 될 수 있다. 그러자면 지난날의 ‘성공 신화’와 결별해야 한다. 대선 압승의 기억도 지워야 한다. 이 대통령에게 가장 힘든 일은 자신과의 싸움일지 모른다. 그의 말대로 경쟁자는 없으니까.
전진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