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아 세월아, 천천히 쉬어가렴”…선인들의 여유가 깃든 곳
《삶이 각박할수록 옛 것을 더 찾게 마련이다. 급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하루 24시간의 틀에서 빠져나와 진정한 삶이란 무엇인가 곰곰 생각해보고자 할 때, 흔히 고택이나 때 묻지 않은 자연을 찾게 된다. 경북 영주시 문수면에 있는 수도리(水島里)에는 예스러운 것이 참 많다. 지명에서 알 수 있듯, 안동 하회마을이나 예천 회룡포처럼 강물이 휘감아 돌면서 육지를 섬처럼 만들어버리는 마을이 수도리다. 순우리말로는 무섬마을이다.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숲에 안긴 채 고운 모래가 깔린 강을 향해 고색창연한 빛을 발하고 있는 그림 같은 전경! 강물에서는 물고기들이 숨바꼭질을 하고 있고, 외나무다리 위에서는 방문객들이 조심스레 걸으며 추억을 쌓는 곳! 이동원의 노래 ‘향수’가 저절로 흥얼거려지는 이 강마을에는 시끌벅적함이 전혀 없다.》
무섬마을에서 화려한 볼거리를 기대했다가는 실망하기 마련. 천천히 강둑과 골목을 걸으며, 자연과 더불어 여유 있게 살았던 선인들의 정신과 지혜를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무섬마을 즐기기다. 이 마을에 처가가 있었던 청록파 시인 조지훈은 ‘별리’를 지어 강마을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바 있다.
이 마을 지형은 길지다. 매실나무 가지에 꽃이 핀다는 ‘매화낙지형’, 혹은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다는 뜻의 ‘연화부수’형이다. 무섬마을 보존회 김한세(70) 회장은 “무섬마을이 태백산과 소백산의 끝자락이며 9개의 골짜기가 마을로 모인다”고 설명했다. 집들이 남향이 아니라 남서향인 이유는 강과 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기운을 그대로 이어받기 위함이라는 것.
각각 봉화와 소백산에서 발원한 내성천과 서천은 마을의 위쪽에서 하나가 돼 약 350도 각도로 마을을 감싸며 흐른다. 그리고 예천군 풍양면의 삼강주막 너머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무섬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666년. 반남 박씨인 박수가 난세를 피해 들어와 현재의 만죽재 고택을 지었다. 그 후 예안 김씨가 시집오면서 자연스레 집성촌이 되었다. 마을에는 고종 때의 의금부도사 김낙풍이 지은 해우당과 만죽재를 비롯해 김뢰진,김덕진,박천립,박덕우 등의 가옥 9채가 경상북도 민속자료나 문화재자료로 등록돼 있다.
영주 선비촌에 있는 고가들은 무섬마을의 고택을 본떠 지은 것들이다.
현재 무섬의 규모는 가옥 40채, 인구 45명. 한국전쟁 전까지 120여 채에 400∼500명이 살던 동네가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 노인들은 주로 자식들이 부쳐주는 돈으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때는 30리 밖까지 무섬 땅이었지요.” 만죽재의 박수양(88) 옹은 마을이 매우 부자였다고 자랑한다. 외나무다리도 3개였다. 현재의 시멘트 다리 자리에 있던 다리는 문수초등학교의 코흘리개들의 등교 코스였다. 당시 초등학생이 약 500명에 달했고, 학교도 분교까지 3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적동리 분교만 남았고, 앞산 너머의 문수초등학교는 ‘물도리 예술촌’으로 바뀌어 기업체의 수련활동이나 학생들의 전통 체험장으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