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춤서 꼬깃꼬깃한 흰 봉투 꺼낸 70대 할머니
“위안부 할머니들 용돈줘요” 1000만원 성금 선뜻
이름 안밝히고 “6·25때 가족 잃고 큰 고생” 사연만
70대 초반의 할머니 한 분이 경기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 사무실에 들어섰다. 17일 오후 6시경이었다.
나눔의 집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자주색 스웨터와 검은색 바지를 입은 이 할머니는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퇴근 준비를 하던 안신권 사무국장이 “할머니 어떻게 오셨어요?”라고 물었다.
이 할머니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너무 큰 고통을 겪었다. 먹을 것이라도 사드리고 용돈이라도 보태달라”며 바지 안쪽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봉투 안에는 500만 원짜리 수표 2장이 들어 있었다.
깜짝 놀란 안 국장이 “너무 큰 돈이라 받을 수 없다”고 사양했다. 할머니는 “이 돈 주려고 아침부터 나왔다. 앞으로 다시는 오지 못할 것”이라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옆에 있던 자원봉사자들이 이름을 물었지만 할머니는 “성은 송 씨고 서울 관악구에 산다”고만 했다.
할머니는 이날 오전 9시경 집을 나섰다. 서울에서 나와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탄 뒤 9시간 만에 퇴촌면 원당리에 내렸다.
병으로 발 모양이 많이 변형돼서 걷기 힘들었지만 성금을 전하려고 시골길 1km를 혼자 걸어 나눔의 집을 찾았다.
봉사자들이 걱정스러운 낯빛을 보이자 할머니는 오히려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너무 늦게 도착했다”며 미안해했다.
이 할머니는 위안부 할머니들과 식사를 함께하고 얘기를 나눈 뒤 오후 8시경 조용히 떠났다.
안 국장은 “6·25전쟁 때 가족을 잃는 등 큰 고생을 했다는 사연만 남겼다. 어렵게 주신 돈을 소중하게 쓰겠다”고 말했다.
광주=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