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문물교류 상징…“日 주식회사 1호”
《‘내가 마지막으로 선 곳은 마루젠(丸善) 앞이었다.’ 1925년 발표된 가지 모토지로(梶井基次郞)의 명작 소설 ‘레몬(영몽)’의 한 구절이 최근 일본에서 적잖은 화제를 낳았다. 소설에 등장하는 마루젠은 의사인 하야시 유테키(早矢仕有的)가 1869년에 창업한 기업. 일본의 개화 초창기에 서양의 서적과 문구를 수입해 판매했고 139년이 지난 지금도 연간 매출 1조 원대의 중견 기업으로서 면면히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이미 83년 전에 발표된 소설이 새삼스럽게 논란의 대상이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유명 소설 무대로 단골 등장… 만년필-타자기 등 첫 소개
인터넷 서점에 밀려 고전… “대학 연계사업으로 재도약”
○ 명작의 무대 마루젠
문부과학성은 올해 3월 고교 3학년 교과서를 검정하면서 ‘레몬’이 실린 한 출판사의 현대문 교과서에 ‘칼질’을 했다.
출판사 측이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글과 함께 게재한 마루젠 교토(京都)지점의 옛날 사진이 특정 기업을 선전할 우려가 있다며 삭제 지시를 내린 것.
문부과학성의 이런 조치는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 조롱거리가 됐다.
마루젠이 비록 ‘특정 기업’이기는 하지만 개화기 일본의 지식인 사회와 서양 문물의 만남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핵심 ‘문화코드’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레몬 외에 마루젠이라는 고유명사가 등장하는 소설을 2, 3개만 꼽아 보면 일본 지식인 사회의 반응은 금방 이해가 된다.
우선 일본 국민의 애독서 순위 1위에 단골로 오르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마음’에 ‘나는 반나절을 마루젠의 2층에서 보낼 각오로 갔다’는 구절이 보인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톱니바퀴’에도 ‘마루젠 2층’이 등장한다.
일본의 대표적 동화작가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는 마루젠에서 산 원고지에 화제작 ‘은하철도의 밤’을 남겼다.
마루젠 개요 구분내용창업 연도1869년업종서적 및 문구·사무용품 판매, 출판, 교육 관련주요 점포 수49곳종업원 수856명(임시직 포함하면 2220명)매출액1025억 엔본사 소재지도쿄 도 주오 구 니혼바시홈페이지www.maruzen.co.jp
○ 주주와 종업원 분리
물론 마루젠은 일본의 문학뿐 아니라 기업사와 상품사(史)를 이해하는 데도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하야시 창업주는 요코하마(橫濱)에 마루젠의 전신인 ‘마루야’를 창업하면서 주주와 종업원을 처음으로 명확하게 분리했다. 즉, 마루젠은 사실상 일본 최초의 주식회사인 셈이다.
마루젠은 1874년에는 종업원 복지를 위해 지금의 생명보험에 해당하는 ‘사망청부규칙’ 제도를 도입했다. 이를 담당했던 임원은 나중에 마루젠을 퇴사한 뒤 일본 생명보험산업 출범의 산파역이 됐다.
일본에 만년필과 타이프라이터를 처음 소개한 곳도 마루젠이었다. 특히 ‘만년필’이라는 이름 자체가 마루젠에서 만년필 판매를 담당했던 종업원의 별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보급한 서적 월부판매의 선구자도 마루젠이었다.
한국에서 ‘하이라이스’로 불리는 ‘하야시라이스’를 처음으로 고안해낸 이가 하야시 창업주라는 설도 유력하다. 일본의 주요 도시에 있는 마루젠의 대형 점포에 가면 하야시라이스를 파는 카페가 반드시 붙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 “다시 한번 마루젠이 되겠다”
이처럼 화려한 역사를 자랑하는 마루젠이지만 지난 20여 년간의 경영은 순탄하지 않았다.
일본 경제의 거품이 붕괴하면서 마루젠이 과거 사놓은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의 가치가 크게 떨어졌다.
아마존 등 인터넷 서점이 떠오르면서 마루젠의 주력사업이던 서양서적 수입판매의 부가가치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2000년에는 채권 투자로 56억 엔에 이르는 손실까지 입었다. 지난해에는 회계부정 스캔들로 경영진이 교체되는 우여곡절도 겪었다.
다행히 자금 부족 문제는 새로운 투자자가 나타난 덕분에 비교적 간단히 해결했다.
그러나 본업의 수익성을 회복하는 문제는 손쉬운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흥망의 기로에서 경영진이 눈을 돌린 곳이 마루젠의 ‘뿌리’였다. 마루젠은 창업정신에 기초해 사업부문별로 새로운 발전계획을 치밀하게 점검한 뒤 종합경영 청사진을 마련해 3월 발표했다. 이 계획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 경영비전이 ‘다시 한번 마루젠이 되겠다’이다.
노무라 야스히로(野村育弘) 경영기획실장은 “마루젠은 창업 초창기부터 학술용 서양서적 수입 보급을 중점적으로 해왔고 대학을 거점으로 사무실을 확장해 왔다”면서 “최대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 대학과의 탄탄한 유대관계를 최대한 활용해 사업을 전개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마루젠의 노하우를 활용해 대학 도서관을 위탁 경영하거나 대학 운영 전반에 대한 컨설팅을 해주는 사업들은 중기 사업계획을 내놓기 전부터 실적이 나오고 있었다”면서 이런 분야의 사업을 강화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도쿄=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