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발유보다 비싼 경유세계적으로 경유 가격이 급등하면서 국내 경유 가격이 휘발유 가격보다 비싸지는 역전 현상이 본격화하고 있다. 22일 서울 서초구의 한 주유소에 휘발유보다 L당 20원 비싼 경유 가격이 붙어 있다. 변영욱 기자
《“솔직히 말해 뾰족한 대책이 없어요.” 유가 급등으로 국내외 증시가 큰 폭으로 하락한 22일 오후, 기획재정부 고위 당국자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정책 기조엔 큰 변화가 없다”면서도 지금이 위기 상황이란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고유가라는 거대한 해일이 한국 경제를 덮치고 있다.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4%대에 고착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는가 하면 수입품 가격이 크게 올라 교역조건이 사상 최악인 상황으로 내몰렸다.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면 가뜩이나 부진한 경기가 더 나빠질 게 뻔하고, 경기를 살리려 금리를 내리는 건 물가가 걸린다. 딜레마다. 국제유가 급등은 ‘원유 및 석유제품 수입가격 상승→국내 물가 상승 및 경상수지 적자 폭 확대→내수 위축, 경기 둔화’라는 악순환 고리의 출발점이 된다.》
○ 물가 상승 우려
물가는 유가에 가장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경제지표다. 원유 가격 상승은 시차를 두고 천천히 국내 최종소비재 물가로 전이되는 만큼 5월 이후 물가가 종전보다 큰 폭으로 오를 가능성이 있다.
재정부도 4월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44개월 만에 처음으로 4% 선을 넘어선 뒤 물가가 더 오르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실제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일어난 직후인 1974년의 물가상승률은 30%에 육박했다. 1978년 2차 오일쇼크 직후 2년여의 기간에도 물가상승률은 30% 선을 넘나들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물가 불안으로 소비가 위축되고 기업 투자가 부진해지는 양상이 장기화될 우려가 있다”고 분석했다.
○ 유가가 경제성장률 까먹는 국면
경상수지 적자는 올해 3월까지 벌써 51억 달러다. 지난해 같은 기간의 3배 수준에 이르렀다. 원유 도입 단가가 급등하면서 상품수지조차 흑자를 장담하기 힘든 상황이다. 상품수지에서 적자를 보면 수출은 이제 한국 경제의 버팀목이 못 된다.
삼성증권은 원유를 들여오는 평균 단가가 배럴당 150달러에 이르면 경상수지 적자가 650억 달러에 이를 것이란 충격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경제성장률과 관련해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발표한 ‘원자재 가격 급등의 원인과 전망’ 보고서에서 “중동산 두바이유 가격이 배럴당 16.5달러 오르면 경제성장률이 1.07%포인트 하락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21일 기준 두바이유 가격은 4월 말보다 16.9달러 오른 상태여서 이미 유가가 성장률을 크게 깎아먹는 상황에 돌입한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원자재 수입 단가가 크게 오르면서 상품을 수출해서 이 대금으로 수입할 수 있는 상품 수를 나타내는 ‘교역조건’도 급격히 악화하고 있다.
22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교역조건 동향’ 자료에 따르면 교역조건 지수는 지난해 말 118.0에서 올해 1분기(1∼3월)엔 108.3으로 떨어졌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이달 19일 수출 중소기업 147개 사를 대상으로 수익성이 악화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물어본 결과 전체의 58.9%가 ‘원유 및 원자재 가격 상승’을 꼽았다. 비용 부담이 너무 커진 것이다.
○ 성장일변도에서 성장과 물가의 균형관리로
미국 석유 전문투자회사인 BP캐피털의 분 피컨스 회장은 “올해 유가가 배럴당 150달러까지 오를 것”이라고 전망했다. 바클레이스, 골드만삭스 등 세계적인 투자은행들도 원유 공급이 부족해 유가가 당분간 고공행진을 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경제 전문가들은 현재의 성장률이 비슷한 규모의 국가에 비해 낮은 수준이 아닌 만큼 성장보다 물가 안정에 정책의 무게중심을 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물가 상승은 소비자가 직접 체감하는 지표여서 내수 위축에 바로 영향을 준다. 반면에 성장률 저하는 일반인이 당장 느끼진 못하지만 몇 년에 걸쳐 장기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물가가 오르면 경기가 나빠져 국제수지도 악화된다”며 “경기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불안 요인을 억제하는 차원에서 물가관리에 신경 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홍수용 기자 legman@donga.com
이나연 기자 larosa@donga.com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