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자영업을 하다 나이가 들어 일을 그만둔 은모 씨는 꾸준히 모은 돈을 금융회사의 고금리 상품에 예금한 뒤 이자로 생활하고 있다.
그는 매월 100만 원 정도의 이자로 아파트 관리비, 공과금, 경조사비를 내고, 가끔 외식도 하는 등 비록 풍요롭지는 않더라도 혼자 기본생활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생활비가 모자라기 시작했다. 자신의 소비가 이전보다 헤퍼지지 않았는데도 기본생활이 어려워진 것이다.
가계부를 들여다본 은 씨는 원인을 발견했다. 1년 전에 비해 아파트 관리비와 공과금이 각각 몇 만 원씩 더 들어가고 있었고, 외식할 때 즐겨 먹는 설렁탕 가격도 어느새 1000원이나 올라 있었다.
뒤통수를 맞은 듯 그의 입에서 탄식이 절로 나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돈을 도둑맞았네.”
이웃에 살고 있는 성모 씨는 성실하기로 동네에서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다. 그녀는 남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부지런히 일해 번 돈을 대부분 저축했다.
얼마 전에도 만기가 된 1000만 원짜리 적금을 찾았다. 아이들이 커서 지금 살고 있는 전셋집을 조금 늘려 가려고 알뜰살뜰 모은 돈이다.
어느 날 고등학교 동창생이 그녀를 찾아왔다. 조그마한 장사를 시작하려는데 돈이 부족하다며 1000만 원을 빌려달라고 했다. 물론 5%의 이자를 주겠노라고 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집을 늘려서 이사 가는 것은 내년에도 할 수 있지. 친구 사정이 급한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며 돈을 빌려줬다.
1년이 지나 친구는 약속대로 성 씨에게 원금 1000만 원과 이자 50만 원을 갚았다.
성 씨는 이 돈으로 1년 전에 미뤘던 이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새 집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1년 전에는 1000만 원만 보태면 조금 큰 집으로 옮겨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이 돈으로 이사 갈 수 있는 집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 사이 전세 가격이 이자보다 많이 오른 탓이었다. 그녀는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자를 받으면 뭐 해. 작년보다 돈의 가치가 형편없이 떨어졌는데….”
【이해】
세상에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사람들이 돈을 좋아하는 이유는 돈이 예술적 가치를 지녀서도 아니고, 돈 자체로 쓸모가 많아서도 아니다. 단지 돈으로 원하는 것을 사거나 할 수 있기 때문에 돈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건 가격이 지속적으로 오르면, 즉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같은 물건이라도 이전보다 더 많은 돈을 내고 사야 한다. 달리 이야기하면, 내가 갖고 있는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의 양이 줄어드는 셈이다. 인플레이션 때문에 돈의 가치가 하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플레이션은 소리 없는 도둑이다. 은밀하게 다가와서 소리 소문 없이 내 지갑에서 돈을 훔쳐가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이 고얀 인플레이션은 사람을 구분해 도둑질을 함으로써 또 다른 후유증을 낳는다.
예를 들어 인플레이션은 채권자의 돈을 훔쳐서 채무자에게 준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자.
어떤 채무자가 100만 원을 빌리면서 이자까지 포함해 1년 후에 105만 원을 갚기로 했다고 하자. 이때 채권자는 지금 100만 원짜리 가구를 살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돈을 빌려준 셈이다.
1년 후 채권자가 약속대로 105만 원을 무사히 돌려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물가가 많이 올랐다면 1년 전에 100만 원으로 살 수 있었던 가구를 이제는 105만 원을 주고도 살 수 없게 된다.
결국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돈을 빌려주는 좋은 일을 하고도 손해를 본 셈이다. 이와 달리 채무자는 갚아야 할 빚의 부담이 줄었으므로 그만큼 이득을 본다.
이뿐만이 아니다. 인플레이션은 성실하게 예금하는 사람이나 정해진 금액의 연금을 받아 생활하는 사람들의 지갑을 털어서 부동산 투기를 하는 사람들의 지갑을 채워준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성실하게 일을 해서 돈을 모으거나 은행에 예금하려는 사람이 줄어들기 마련이고 투기가 성행한다. 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그래서 인플레이션은 참으로 성질이 고약한 도둑이다. 한 국가를 파탄에 빠뜨릴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좋은 방법은 인플레이션 전염병을 확산시키는 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인플레이션 예방이 모든 국가에 중요한 이유다.
한진수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경제학 박사
정리=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