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들은 어느 매장서 어떻게 고를까
《# “‘지브라(얼룩말) 조’라고 해요”
얼룩말 무늬의 의상과 목걸이를 즐겨 하는 직장인 조연우(29·연구원) 씨. 그가 패션리더로 불린 것은 5년 전부터였다. 두꺼운 하체가 콤플렉스였던 그는 보완해줄 옷을 찾던 중 어느 날 홍익대 앞 빈티지(구제 스타일) 숍에서 산 부츠컷 청바지를 입으며 하체 결점을 해결했다. 시간 날 때마다 홍대전철역 앞 가게 ‘폭스바겐’부터 ‘커피프린스’ 골목까지 늘어선 옷가게에 들러 부츠컷 청바지를 샀다. 지금은 ‘이 매장에선 이렇게 흥정하면 된다’는 정보를 알 정도가 됐다. 인정받는 것은 비단 패션 감각뿐만이 아니었다. 조 씨는 “옷을 고르듯 업무에 있어서도 중요한 일부터 빨리 처리해 사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 “자기야 제발… 살살 만져!”
연예인 가상 커플들의 신혼생활을 다루는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우리 결혼했어요’. 이 코너에 등장하는 가수 서인영의 남편 크라운제이는 아내 못지않게 패션에 신경 쓰는 신세대 남편으로 비친다. 아내에겐 “미국 출장 중 ‘허리케인’ 때문에 (당신) 구두를 못 샀다”며 둘러대지만 자신의 속옷과 힙합 티셔츠는 한 보따리 산 이 남자. 한정판 모자, 티셔츠는 밥을 굶는 한이 있더라도 직접 가게에 가서 사야 직성이 풀린다. 그의 약점은 바로 매장에서 직접 산 ‘티타늄’ 선글라스에 지문 내기. 선글라스에 손을 대기라도 하면 그는 울부짖는다. “자기야, 제발….”》
“대충 무난한 걸로 사와”라며 애인이 골라준 옷을 주는 대로 입었던 과거 남자들게 패션은 ‘사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한정판 의상을 구하러 쇼핑하는 요즘 남자들에겐 스타일은 목숨만큼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들이 저마다 여성 못지않은 패션 쇼핑 고수임을 자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만의 쇼핑 코스에서, 몸소 터득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쇼핑을 하는 남자들의 시대, 이들은 어디서 어떻게 옷을 사고 있을까? 누가 진정한 고수인지 비법 한 번 들어보자.
○ 코스의 비밀 1… 빈티지부터 ‘아웃렛’까지
① 홍대 앞 스트리트 패션 고수
길거리 패션을 추구하는 직장인 배태현(27) 씨의 쇼핑 코스는 홍대 앞 동교동 삼거리부터 6호선 상수역까지 이른바 ‘홍대 스트리트 패션’ 거리. 청바지 전문매장 ‘도난’(3만∼19만 원)을 시작으로 수입 티셔츠 전문매장 ‘티 홀릭’(3만∼5만 원), 스케이트 보드 액세서리 매장 ‘아이콘스’(10만 원대), 비보이 패션 매장 ‘댄서 숍’을 거쳐 신발 전문 매장인 ‘라운드 업’과 ‘월스토어’, 힙합 패션매장 ‘브라운 브리스’, 마지막으로 상수역 앞 매장 ‘스펠링’에 도착한다.
20대 빈티지 마니아들에게 각광받는 이 지역은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희귀한 의상이 많다. 5년간 배 씨가 연구한 쇼핑 노하우는 ‘가게 주인을 감동시켜라’다. 사람들이 몰리는 오후시간이 아닌 아침 개장시간에 ‘첫 손님’으로 방문하면 할인을 받을 수 있다. 또 옷에 대해 이것저것 물으며 점원과 친분을 쌓는 것도 중요하다. 대부분 정찰제지만 개인 매장인만큼 다음 번 방문 때 뜻하지 않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② 도심 외곽 아웃렛 고수
신상품만이 전부는 아니다? 1초라도 ‘유행’에 반드시 앞서 나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상설 할인매장은 ‘구세주’나 다름없다. 회계사 김영석(29) 씨는 ‘아웃렛 쇼핑의 달인’으로 꼽힌다.
김 씨의 코스는 서울 금천구 가산동에 있는 ‘가산 디지털단지 아울렛’과 김포공항 국제선 내 ‘김포공항 아울렛’. 중저가 브랜드부터 ‘지오 송지오’나 ‘솔리드 옴므’ 같은 유명 디자이너 의상까지 최대 70%까지 싸게 살 수 있다.
김 씨가 말하는 아웃렛 쇼핑의 핵심은 바로 ‘두어 번 보기’. 마음에 든다고 단번에 구입하지 말고 충분히 시간을 두고 두어 번 훑어본 다음 사라는 것이다. 아웃렛에는 몇 년 전 상품부터 신상품까지 함께 있고 똑같은 물건이라도 매장마다 판매가격이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김 씨의 아웃렛 쇼핑코스는 ‘개별 로드숍’에서 대형 아웃렛 순(가산 디지털단지 아울렛-개별 로드숍에 물건이 더 많음), 또 영캐주얼에서 중·고가 남성 브랜드 순(김포공항 아울렛-비슷한 디자인의 저렴한 의상이 영캐주얼에 많음)이다.
6년째 경기 용인시의 ‘죽전 패션타운’에서 쇼핑하는 직장인 송종현(30) 씨는 미리 사고 싶은 목록을 인터넷에서 보고 뽑은 다음 해당 브랜드 매장만 방문한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신사복, 또 다른 쪽은 세미캐주얼, 스포츠 브랜드 매장이 있다는 것도 방문 전 중요한 고려 대상이다.
송 씨는 “신상품이 입고되는 매주 목요일을 노려야 한다”고 말했다.
○코스의 비밀 2… 맞춤 매장부터 청담동 명품 숍까지
① 맞춤 고수
모델 겸 DJ로 활동 중인 한빈(31) 씨는 이른바 ‘맞춤 패션 고수’로 통한다. 189cm의 큰 키 때문에 일찌감치 기성복 구입을 포기한 그는 패션 아이템 별로 맞춤 매장을 돌고 있다.
한 씨의 맞춤매장 코스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내 맞춤 정장 매장 ‘JJ’(30만 원대)를 시작으로 선릉역 근처 셔츠 전문 맞춤 매장 ‘해밀턴’(3만∼4만 원), 페도라(중절모) 등 수제 모자 전문 매장인 학동 사거리 ‘루이엘’(7만∼15만 원)까지. 한 씨는 “기성복보다 값싼 맞춤 매장이 많아 이젠 맞춤 의상실도 쇼핑하듯 자유롭게 드나드는 시대”라고 말했다.
② 압구정 편집매장 고수
광고 그래픽디자이너 이종태(29) 씨의 쇼핑코스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로데오거리 내에 위치한 편집매장이다. ‘록 앤 록’ 바 골목에 위치한 셔츠, 청바지 전문 매장 ‘쇼 룸’(17만∼22만 원)을 시작으로 빈티지 재킷(60만 원대)으로 유명한 ‘샌프란시스코 마켓’을 들러 중저가 정장 전문 편집매장 ‘루카스 블랙’(12만∼14만 원) 등 이 씨의 쇼핑 코스는 골목 내 7, 8곳의 편집매장 위주다. 한 달에 한 번 이상 쇼핑을 하는 이 씨의 쇼핑 철칙은 ‘충분히 즐겨라’.
이 씨는 “여자친구도 떼놓고 혼자 하루 종일 쇼핑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마음에 드는 옷을 바로 사지 말고 한꺼번에 몰아 사서 할인 혜택을 받는 지혜도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③ 청담동 명품 고수
제값 주고 구입하면 하수(下手)? 고가 명품브랜드가 밀집한 강남구 청담동 ‘명품거리’의 남성 쇼핑 고수들은 일명 ‘인맥’ 쇼핑을 통해 합리적 쇼핑을 강조한다.
아트디렉터 김석현(30) 씨는 친구인 디자이너 강동준 씨가 운영하는 브랜드 ‘다그 닥’에서 원 가격(100만 원)보다 싸게 정장을 산다.
강 씨는 청바지는 ‘돌체 앤 가바나’(50만∼90만 원)에서, 양말은 ‘타임’(1만2000원) 매장에서 각각 구입한다. 여기서도 주위 패션계 종사자나 아는 인맥을 통해 가격 할인, 이벤트, 사은 행사 등 VIP 고객 위주의 정보를 얻는다.
명품 매장에서는 주로 오전 시간을 이용하면 VIP 대접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김 씨의 쇼핑 시간은 평일 오전이 대부분이다. 그는 또 “충동구매를 막기 위해 단품 위주로 물건을 산다”고 말했다.
○ 부끄러워? 아니 즐거워… 홀로 선 남성 쇼핑 고수들
패션 쇼핑의 중심에 선 남성 고수 대부분은 이제 혼자서 쇼핑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들은 사전에 필요한 것만 골라 계획한 다음에 쇼핑하고 이를 즐기는 수준에 이르렀다. 패션 컨설팅업체 ‘브레인파이’의 피현정 대표는 “여성 쇼핑 고수들이 유행에 민감한 반면 남성 쇼핑 고수들은 자기 의지에 따라 쇼핑을 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남성 편집매장인 ‘분더숍 맨’의 황유선 MD는 “남성 손님들의 절반 이상이 ‘나 홀로 쇼핑’족”이라며 “물건을 사기 전 인터넷에서 정보를 수집하거나 다른 매장에서 가격을 비교하는 등 여자만큼 꼼꼼하게 따지는 남성 고객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나 홀로’ 남성 쇼핑 고수가 늘고 있는 것은 설문 조사를 통해서도 뚜렷이 나타났다. 본보가 인터넷 쇼핑몰 ‘G마켓’의 남성 방문자 272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전체의 27.9%가 한 달에 한 번 혼자 쇼핑을 즐긴다고 답했다. 일주일에 한 번(18.4%), 심지어 늘 혼자 한다(18%)는 응답도 꽤 높게 나타났다. 평균 쇼핑시간은 절반에 가까운 49.3%의 남성이 1∼2시간을 꼽았다.
혼자 쇼핑하는 이유를 묻자 남에게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응답이 32%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시간이나 돈을 아낄 수 있다는 응답이 29.8%였다.
이들이 쇼핑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브랜드 인지도(24.3%)이지만 아예 그런 것조차 없다는 응답도 22.7%나 됐다.
쇼핑칼럼니스트 배정현 씨는 “쇼핑 전에 원하는 스타일을 정확히 파악하고 매장 내 점원들의 추천에 흔들림 없이 자기 의지대로 쇼핑하는 것이 진정한 쇼핑 고수”라고 말했다.
서울대 김난도(소비자아동학) 교수는 “‘쇼핑몰’ 문화가 발달하고 ‘소비=능력’으로 평가받는 시대에 현대 남성들은 쇼핑 그 자체를 ‘놀이’로 여기고 있다”며 “점차 쇼핑 고수에 남녀의 구분이나 차등이 없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