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가 車값보다 4배 비쌀 때도 있었죠”
“언젠가 아내가 처음 사용하던 휴대전화를 잃어버려 같은 모델을 구하려고 청계천을 찾은 일이 있어요. 몇 달을 뒤졌는데도 결국 그 모델을 찾지 못했어요. 얘기를 들어보니 예전 휴대전화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는 거예요. ‘아차’ 하면 한국 휴대전화의 족보 자체가 사라지겠다 싶었지요.”
30년간 출판언론인으로 활동하던 이병철(60) 씨가 유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휴대전화를 모으게 된 이유는 간결하고 분명했다.
“2000년에 접어들면서 한국은 세계 시장을 이끄는 휴대전화 강국에 올랐어요. 그런데도 그 분야 종사자들조차 2, 3년 전에 생산한 모델을 잘 기억하지 못해요. 이렇게 가다 보면 수년 뒤면 어떤 기록도 남지 않을 것 같더군요. 우리 휴대전화의 역사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죠.”
얼마 전 그는 8년간 힘들게 모은 1200여 대의 휴대전화를 정리해 경기 여주군 점동면에 국내 최초의 ‘폰박물관’을 열었다.
이 씨의 컬렉션은 휴대전화의 역사에 능통한 고수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짜임새가 있다. 1989년 시작된 1세대 전화부터 2, 3세대를 이끈 대표 모델들이 방대한 수집 목록에 올라 있다. 삼성이 첫선을 보인 국산 휴대전화 1호(SH-100)는 물론 LG가 개발한 최초의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의 전화기도 소장 목록에 올랐다. 요즘 유행하는 삼성의 ‘햅틱스’와 LG ‘오즈’의 할아버지뻘 되는 스크린 터치방식 모델도 눈에 띈다.
이들 휴대전화는 한국 정보기술(IT)의 발전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25년 전만 해도 차를 타고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이 전국에 고작 348명뿐이었어요. 전화기가 권력의 상징인 시절이었지요. 1984년 차량 이동전화 서비스가 시작되자 부자들이 대당 1200만 원하는 전화기를 너도나도 차에 놓기 시작했죠. 차 값이 300만∼400만 원 했으니 배보다 배꼽이 더 컸던 셈이에요.”
상대방 얼굴을 보며 통화하는 지금 세대는 먼 나라의 얘기로 들릴지도 모른다. ‘영원한 맞수’ 삼성과 LG의 불꽃 튀는 신경전도 재미를 더한다.
“서울올림픽 직후인 1989년 삼성이 자체 기술로 국산 1호 휴대전화를 만들었어요. 휴대전화 국산화에 한발 앞섰던 셈이죠. 반면 한국을 휴대전화 강국으로 키운 CDMA 휴대전화는 LG가 삼성보다 두 달 먼저 내놨어요.”
세계 최초의 ‘500만 화소폰’ ‘1000만 화소폰’ ‘두께 1cm 미만 초슬림폰’ ‘초경량폰’ 등 한국이 휴대전화 역사에 남긴 기록만 수십 개에 이른다. 이 씨의 컬렉션은 단순히 기술적인 발전에만 주목하지 않는다. ‘희귀 디자인’ ‘1000만 대 이상 팔린 모델’ ‘여성에게 인기를 끈 모델’ 등 휴대전화가 사회 경제 문화사에 끼친 영향을 22가지 주제로 나누기도 했다.
수집 목록에는 휴대전화만 올라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 근현대사의 격동기를 곁에서 함께 보낸 공전식 전화기와 모시모시 전화기, 기억에서조차 사라지고 있는 수동식 교환기도 들어있다. 끈질긴 노력 끝에 구한 지멘스의 1868년형 테이프 출력 모스부호 수신기와 웨스턴일렉트릭사가 1877년 만든 벽걸이 교환기, 일제 침탈 초기 통신선로를 그린 ‘한국통신약도(韓國通信略圖)’는 수집가들 사이에서 희귀 유물로 널리 통한다.
그러나 혼자서 족보를 완성하기에 힘에 부치는 일이 많다. 해외에 수출된 국산 전화기를 국내에서 구하지 못해 해외에서 들여온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 2003년 미국에서만 1만 대가 한정 판매된 ‘매트릭스폰’과 세계적 오디오회사 뱅앤올룹슨과 공동 개발한 ‘세린’은 2, 3배 비싼 값에 역수입했다.
세계 정상급 휴대전화 박물관을 꿈꾸는 이 씨의 목표는 그리 실현 불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누구나 한국이 휴대전화 강국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한국이 휴대전화 세계 1위국이 된다면 당연히 폰박물관도 세계에서 으뜸이 되지 않을까요. 휴대전화야말로 잘 보존해야 할 미래 지향적인 우리의 유물이지요.”
여주=박근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un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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