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6월 4일 오후 5시 20분(현지 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 신관 23층 특별실. 내외신 기자 3000여 명이 이 호텔에 몰렸다.
노태우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역사적인 한소(韓蘇) 정상회담을 하는 자리였다. 한국과 소련의 정상이 만난 것 자체가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주역인 고르바초프의 개방 및 등거리 외교정책과 노태우 정부의 북방 외교정책이 맞물린 산물(産物)이었다.
1990년 4월 7일 노 대통령은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미소(美蘇) 정상회담을 위해 5월 30일 워싱턴에 도착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노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김일성이 남북대화에 불응하고 있는 상황에서 남북관계를 푸는 길은 고르바초프를 만나는 것”이라며 “극비리에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라”고 지시했다.
작업을 주도한 사람은 당시 노재봉 대통령비서실장과 김종휘 대통령외교안보담당보좌관. 또 청와대 직원 서너 명이 실무작업을 했다. 이들은 ‘정상회담 얘기가 중간에 새 나가면 공직을 떠난다’는 사표를 써놓고 일했다. 김종휘 보좌관은 정상회담 장소와 일정을 논의하기 위해 5월 1일 미국으로 날아가 고르바초프 측근들을 만났다.
보안 유지를 위해 외무부에조차 정상회담 개최가 물밑에서 합의된 5월 17일이 지나서야 통보됐다. 한소 정상회담이 언론에 공식 발표된 것은 5월 31일 오후 3시. 노 대통령의 방미 일정은 ‘태백산’이라는 암호로 불렸다.
언론 발표 일정을 놓고도 양측은 신경전을 벌였다. 소련에선 노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로 떠나는 6월 3일에 공식 발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청와대 측은 “대통령이 한국을 떠나는 날 발표를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주장해 하루 당긴 6월 2일 발표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막판까지 보안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청와대는 소련의 양해를 구하고 5월 31일 오후 3시 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전격 공개하게 된다. 소련이 막판까지 정상회담 개최 사실을 공론화하는 것을 주저한 이유는 북한의 움직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날 정상회담 시간은 1시간 5분. 이를 위해 노 대통령은 호텔에서 1시간 20분이나 고르바초프를 기다려야 했다. 고르바초프가 건강을 이유로 이날 스탠퍼드대 특별강연을 예정보다 1시간 늦게 시작한 데다 다음 일정인 미국 기업인 초청오찬도 줄줄이 늦춰졌다. 이 때문에 당초 이날 오후 4시 예정된 회담은 오후 5시20분이 돼서야 비로소 성사됐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