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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知논술/영화, 생각의 보물창고]터미널

입력 | 2008-06-09 03:01:00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2004년 작 ‘터미널(The Terminal)’은 국제공항 환승터미널에서 9개월간 살아온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너무 비현실적이고 황당하다고요? 아닙니다. 때론 현실이 영화보다 더 황당하답니다. 영화 속 얘기는 프랑스 파리 드골공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습니다. 영국계 이란인 메란 카리미 나세리(66)가 그 주인공이죠. 그는 영국 유학 시절 이란 왕정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이란에서 강제추방을 당했고, 이후 국제 미아 신세가 되고 말았어요. 결국 1988년부터 꼬박 18년을 드골 공항 대기실에서 먹고 자면서 ‘터미널 맨’이란 별명까지 얻었죠.》

[1] 스토리라인

동유럽의 작은 나라 크로코지아. 이곳 출신의 평범한 남자 빅터 나보스키(톰 행크스)가 뭔가 부푼 꿈을 안은 채 비행기를 타고 미국 뉴욕 JFK 공항에 당도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 청천병력? 나보스키의 미국 입국이 거절된 겁니다. 고국인 크로코지아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는 바람에 크로코지아는 하루아침에 유령국가가 되었고, 나보스키의 여권과 비자 역시 무용지물이 되고만 것이죠.

뉴욕으로 들어갈 수도, 조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게 된 나보스키. 영어 한마디 할 줄 모르는 그는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공항 속 외로운 이방인일 뿐입니다. 할 수 없이 그는 공항 환승 라운지에 여장을 풀고 숙식을 해결하며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공항 보안책임자인 프랭크(스탠리 투치)는 골치가 아픕니다. 혹시 나보스키가 무슨 문제라도 되면 17년을 고대해 온 국장 승진 기회가 물거품처럼 사라질지 모를 일이니까요. 프랭크는 슬쩍 입국 심사대 문을 열어놓고 나보스키로 하여금 밀입국하도록 유도하지만, 나보스키는 더듬거리는 영어로 “난 기다린다(I wait)”라고 힘주어 말하면서 정당한 입국자격이 부여될 날을 뚝심 있게 기다립니다.

나보스키가 공항에 머무는 날이 하루 이틀 늘어날수록 변하는 건 그가 아니라 공항이었습니다. 나보스키의 따스한 인간애는 차갑고 사무적인 공항 터미널의 체온을 높여놓기 시작하고, 헌신과 사랑을 몸으로 보여주는 나보스키를 공항 직원들은 ‘영웅’이라 부르기에 이릅니다.

아,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나요? 9개월의 기다림 끝에 조국은 다시 평화를 되찾고, 나보스키는 꿈에 그리던 뉴욕 땅을 밟습니다. 나보스키가 뉴욕에 그토록 오고 싶어 했던 진짜 이유는 뭘까요?

[2] 핵심 콕콕 찌르기

이 영화 ‘터미널’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키워드를 찾아볼까요? 어렵다고요? 너무 겁낼 건 없어요. 영화 속 등장인물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들 사이엔 딱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니까요. 그 공통점이 바로 영화의 핵심어랍니다.

생각해 보세요. 주인공인 나보스키, 아름다운 여승무원 아멜리아(캐서린 제타 존스), 토레스라는 여성 입국 심사원을 수년간 짝사랑해 왔지만 말 한마디 건넬 수 없었던 수화물 관리사 엔리코, 그리고 백발이 성성한 인도 출신의 공항 청소부…. 이들 모두에겐 똑같은 점이 하나 있어요. 뭔가를 애타게 ‘기다리는(waiting)’ 사람들이란 사실이죠.

주인공인 나보스키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소원(유명 재즈 아티스트 베니 골슨의 친필 서명을 받는 것)을 대신 이루기 위해 뉴욕 땅을 밟을 그날만을 기다립니다. 승무원 아멜리아는 자신에게 상처만 주는 유부남 애인의 전화를 하염없이 기다립니다. 수화물 관리사 엔리코는 짝사랑해 온 여인이 자신을 알아봐줄 그 순간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나이 든 청소부는 조국인 인도로 돌아가 가족과 재회하게 될 그날을 기다립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나보스키를 미워하는 공항 보안 책임자 프랭크도 뭔가를 기다리기는 마찬가집니다. 그는 공항을 책임지는 국장의 자리에 오르기를 애타게 기다리니까요.

그렇습니다. ‘기다림.’ 수많은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면서 기다림을 숙명처럼 계속하는 공간, 공항터미널. 이는 기다림의 연속인 우리네 인생에 대한 아름답고도 쌉쌀한 비유였던 것이죠.

[3] 더 깊이 생각하기

이 영화의 첫 장면을 유심히 살펴볼까요? 뉴욕 공항 입국심사원들은 하나같이 위압적인 표정으로 미국 방문자들에게 묻습니다. “(미국) 방문 목적은 뭔가요(What is your purpose of visit)?”

입국 심사원들은 그 나라의 얼굴입니다. 이 장면은 외부인에게 배타적으로 변한 미국(인)에 대한 은유로도 볼 수 있어요. 시곗바늘을 돌려 이 영화가 만들어진 2004년으로 돌아가 볼까요? 끔찍한 9·11 테러가 발생한 지 겨우 3년이 지난 시점이에요. 게다가 영화 속에서 수백 개의 감시 카메라를 돌려보면서 나보스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공항 보안책임자 프랭크의 모습을 보세요.

자, 이쯤 되면 감이 오나요? 그래요. 영화의 공간적 배경인 공항터미널은 ‘기다림’의 공간인 동시에, 그 자체로 미국이란 거대국가에 대한 은유였습니다. 외국인들을 잠재적인 테러 용의자로 보면서 불신의 시선을 멈추지 않았던, 9·11 테러 직후의 미국 말입니다(물론,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공항터미널은 수많은 인종이 한데 모여 사는 다인종 다문화 국가 미국을 뜻한다고 볼 수 있겠죠?).

여기서 영화가 깊숙이 숨겨놓았던 메시지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네요. 나보스키, 미약한 이방인에 불과했던 그가 ‘인간애’라는 군불을 때어 차갑고 배타적인 공항터미널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넣는 모습. 이는 9·11 테러의 충격 이후 자폐증을 앓아가는 미국이 다시 과거의 열린 마음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스필버그 감독의 희망 섞인 메시지라고 볼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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