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바다의 문을 막아 지키니 다른 나라의 선박은 삼가 지나지 말라는 뜻).’
병인양요 이듬해인 1867년,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서울로 들어가는 요충지 인천 강화도의 덕진돈대 남단에 이 같은 문구가 새겨진 비를 세웠다. 외국 선박의 강화해협 접근을 막겠다는 의지의 천명이었다.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로 큰 피해를 본 터여서 외세에 대한 경계심을 늦출 수 없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희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1870년 미국이 조선을 원정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1866년 발생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사과를 핑계 삼아 1867년부터 통상 및 문호 개방을 요구했다.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무력 행동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1871년 5월 16일 미국의 아시아 함대 5척이 일본 나가사키(長崎)항을 출발해 조선으로 향했다. 미군은 충청도 앞바다를 거쳐 6월 1일 강화해협 남쪽 초입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강화도 진지의 조선군은 이를 침입으로 간주해 광성보 등지에서 포격을 가했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조선 정부는 6월 3일 어재연(1823∼1871) 장군이 이끄는 강화도 병력 400명과 서울에서 급파된 병력 600명을 광성보에 배치했다.
며칠 동안 미군과의 협상이 진행됐다. 그러나 협상은 성과를 보지 못했고 6월 10일 미군은 강화도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남북전쟁을 거치며 성능이 향상된 총기와 화포, 숙련된 병사 1000여 명을 갖춘 미국 군함 5척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조선군은 여러모로 역부족이었다. 그날 강화도 동남단의 초지진이 함락됐고 그렇게 미군은 강화도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다음 날인 11일엔 초지진 위의 덕진진과 최대 보루였던 광성보까지 함락됐다. 어재연 장군과 조선 수비병들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전력을 다해 싸웠으나 전원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광성보를 점령한 미군은 조선군 진영에 내걸려 있던 수자기(帥字旗)를 내리고 성조기를 올렸다. 수자기는 총지휘관이 있는 본영에 내거는 깃발. 누런 삼베 천에 ‘帥(수)’라고 적혀 있어 수자기라 불렀다.
당시 미군은 이 수자기를 전리품으로 약탈해 갔다. 이 깃발은 미국 메릴랜드 주 애나폴리스의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문화재청은 최근 수년간의 반환 협상 끝에 2007년 10월 10년간의 장기 임대 형식으로 수자기를 국내에 들여왔다. 신미양요의 비극이 발발한 지 136년 만의 귀향이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