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송신기의 전원을 켰다. 멀리서 전해 온 선명한 소리가 큰 회의실을 한달음에 가로질렀다. 연주자가 곁에 있는 듯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물 붓는 소리와 종이 찢는 소리가 생생하게 귓전을 울렸다.
1935년 6월 11일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이자 발명가인 에드윈 암스트롱이 무선학회 세미나장에서 FM 방식을 처음으로 공개 시연했다. 직직대는 잡음, 희미한 신호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 기울여야 하는 AM 방식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전에 들어본 적 없는 명징한 소리를 전달하는 방법을 찾은 것이다.
소년 암스트롱은 혼자 노는 시간이 많은 수줍은 아이였다. 모스부호 장치를 만지작거리거나 위대한 과학자와 발명가들의 이야기에 빠져들곤 했다. 1909년 컬럼비아대 전기공학과에 진학한 암스트롱에게 ‘당연한 일’이라고는 없었다. 그는 한 가지 일에 무섭도록 몰두했고 확신에 찬 단언에도 질문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는 ‘괘씸한’ 청년이었다.
대학 재학 시절부터 무선기술을 연구한 암스트롱은 오늘날 전기회로 기술에서 폭넓게 응용되는 중요한 발명들을 해냈다. 특허권 판매로 컬럼비아대 조교수였던 30대 초반에 이미 그는 백만장자였다. 그러나 부는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일 뿐이었다. 당시 암스트롱은 월급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는데, 행정 업무와 수업 대신 오로지 연구에만 에너지를 쏟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순진하고 완고한 성품이 뛰어난 연구 성과를 내는 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그를 몰락하게 만든 면도 있다고 후세인들은 평가한다. 시대를 앞서 FM을 발명했지만 그는 홍보를 할 줄 몰랐고 기업의 힘을 과소평가했다. 다만 엔지니어로서의 자존심이 있었다.
FM의 고감도에도 불구하고 미국 굴지의 무선장치 제조회사였던 RCA는 암스트롱의 발명에 시큰둥했다. 이 회사는 이미 AM 방식으로 많은 투자를 한 터였다. 그러나 암스트롱이 발로 뛴 덕에 군소 방송사들이 FM 방송을 시작했고 서서히 청취자를 확보해 갔다.
좀 더 많은 주파수대를 차지하려는 승부는 암스트롱과 RCA 사이에서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 연방통신위원회는 TV 방송에 주력하는 RCA의 손을 들어줬고, 암스트롱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간 사용해 온 FM 방송장비와 시설이 고철이 되고 만 것이다.
패배한 암스트롱은 1948년 RCA와 이 회사 소유의 방송사인 NBC가 FM 관련 특허를 침해했다는 소송을 제기했지만 재판이 끝없이 이어지면서 그는 파산 상태에 이르렀고 병마저 얻었다. 1954년 1월 31일 밤, 지친 암스트롱은 코트와 머플러, 장갑, 모자를 모두 갖춘 채 아파트 창문을 열고 10층 아래로 뛰어내렸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