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크리스마스를 보름쯤 앞두고 핀란드의 북극권인 로바니에미(북위 66도)를 찾았을 때다. 아침 해가 오전 9시쯤 돼서야 뜨더니 점심 식사 도중에 져버렸다. 덕분에 점심 식사는 한밤중의 이벤트가 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해가 가장 길다는 하지(6월 21일)를 앞둔 지난달 22일 노르웨이의 올레순(북위 62도)에서 정반대의 일을 겪었다. 오후 7시경 시작한 저녁식사가 오후 10시쯤 돼서야 끝났는데 서편 하늘에는 그제야 멋진 노을이 펼쳐지고 있었다. 물론 이날 깜깜한 암흑의 밤까지는 2시간 이상을 더 기다려야 했다. 통칭 흑야(겨울) 백야(여름)라고 불리는 이 특이한 기상 현상은 북위 60도 이상의 북반구 고위도(러시아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캐나다)에서 한여름과 한겨울에만 벌어진다. 원인은 23.5도로 기울어진 지구의 자전축이다. 춥고 눈 내리는 겨울이야 일조시간까지 짧아 이런 곳을 찾는 사람이 없지만 일조 시간이 긴 여름은 다르다. 주민도 들뜨지만 관광객은 더하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 축제는 그렇게 시작됐다. ‘백야’(White Night)는 한여름의 낮 같은 밤을 부르는 ‘러시아식’ 표현이다. 핀란드와 노르웨이, 스웨덴에서는 달리 부른다. ‘미드나이트 선(Midnight Sun)’, ‘한밤의 태양’이다. 이런 잠 못 이룰 한여름의 긴긴 밤. 알 파치노가 주연한 할리우드 무비 ‘인솜니아’(2005년)는 그 고통을 잘 보여준다. 알고 보니 이 영화의 원전은 1997년 스칸디나비아의 북극권을 무대로 한 동명의 노르웨이 영화다. 그 배경을 알래스카로 옮긴 2005년 할리우드 판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리메이크한 것이다. ‘인솜니아’는 ‘불면증’을 뜻한다. 그 노르웨이로 인솜니아 체험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내가 찾던 것은 형사로 분한 알 파치노가 미드나이트 선 아래서 겪던 불면의 고통이 아니었다. 그 반대로 자발적인 ‘비면(非眠)’을 통해 얻는 여행의 환희다. 한 낮의 저녁 식사, 한밤의 노을, 마치 시간을 번 듯한 착각 속에서 맛보는 통쾌한 일탈. 거기에 아름다운 피오르의 자연풍광까지 덤으로…. 한여름 노르웨이가 준 선물은 이처럼 풍성했다. 미드나이트 선에 보석처럼 빛나는 노르웨이의 피오르로 여행을 떠난다.》
▼영상 취재 : 동아일보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신기하고 앙증맞은 어항과 피오르… 동화나라 온 듯 오전 6시. 여객선은 여전히 피오르의 호수 같은 바다를 지나고 있었다. 베르겐 항을 출발한 게 어제 오후 8시다. 이제 3시간 뒤면 올레순에 도착한다. 그리고 다시 1시간만 더 가면 세상의 피오르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워 유네스코가 ‘어머니 지구’의 모습 그대로라며 세계유산으로 선정한 예이랑에르 피오르에 닿는다. ○ 16km 협곡 ‘지구의 어머니’ 품처럼 포근 7층 갑판에 서서 노르웨이 서해안을 장식하는 거대한 피오르를 지켜보았다. 피오르란 대륙을 덮고 있던 빙하가 녹으면서 형성된 특별한 지형이다. 수 km 두께의 거대한 빙하에 짓눌린 수백 만 년 동안, 암반은 흘러내린 빙하에 파여 거대한 협곡으로 변했다. 그 협곡은 1만 년 전 지구 마지막 빙하기에야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바위 산악의 협곡이 바닷물에 둘러싸인 것은 녹은 빙하로 인한 수면 상승 때문이다. 오전 9시. 북위 62도의 올레순 항에 닿았다. 여기서 40여 명의 관광객을 더 태운 후르티루텐 여객선은 노르웨이 해의 해안선을 따르던 이제까지와 달리 좁은 피오르 계곡을 비집고 내륙을 향한다. 목적지는 예이랑에르. 폭 200∼300m의 좁은 피오르 협곡에 들어선 순간 뉴질랜드 남섬의 피오르 관광지인 밀퍼드사운드가 떠올랐다. 협곡을 이룬 거대한 절벽, 한 가닥 실처럼 걸친 폭포. 거기까지는 뉴질랜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만큼은 뉴질랜드에서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오지에 초지를 일구고 빨갛고 노란 집을 짓고 사는 모습이다. 협곡 아래에, 길도 없는 물가에 이렇듯 예쁜 집을 짓고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이 8∼10세기 유럽을 풍미한 바이킹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오후 1시 30분. 16km의 피오르 크루즈도 끝나고 배는 협곡의 막장에 이르렀다. 예이랑에르다. 이 협만에는 크루즈 나루가 없다. 그래서 유람선 승객은 보트로 갈아타고 상륙한다. 나루 주변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그러나 감탄은 아직 이르다. 예이랑에르 피오르의 진풍경은 산 중턱(해발 300m)의 플뤼달렌 협곡에서야 조망되기 때문이다. 자동차로 오른 플뤼달렌 협곡의 전망대. 예이랑에르 피오르의 모습은 알프스 산맥을 바닷물로 채운 듯하다. 피오르의 협곡과 그 사이에 갇힌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이것을 사운드라고 부른다), 거대한 산악이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가운데 물가의 예이랑에르 마을이 동화 속 요정처럼 앙증맞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 협곡에 갇힌 바다에는 유람선이 정박해 기막힌 풍광을 연출한다. 푸른 하늘의 흰 구름과 무채색의 피오르가 이루는 색채의 조화도 기묘하다. 주민이라고는 단 234명뿐인 곳. 마을 안 ‘노르스크 피오르 센터’에 가서야 눈사태 산사태와 싸우며 삶의 터전으로 일궈낸 이곳의 빛나는 역사를 알 수 있었다. 이곳에 배가 닿은 것은 1869년. 당시는 영국인 선교사였지만 이후로는 유람선이 줄을 이어 1900년에 이미 연간 100척을 돌파했다. 관광 시즌인 6∼9월에는 176척이 찾는다. ○ 성수기 6∼9월 유람선 176척 드나들어 마을은 울릉도의 도동항을 꼭 닮았다. 절벽 아래 물가에 겨우 마련한 옹색한 평지, 양편의 절벽에 가로막힌 산악지형이 그렇다. 나루에서 외부로 통하는 길은 두 개다. 플뤼달렌 협곡을 지나 달스니베르 산 전망대(1476m)와 오슬로로 이어지는 국도, 지그재그로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는 ‘이글로드’에서 연장되는 올레순으로 가는 길이 그것이다. 가파른 산기슭에 건설한 이글로드는 멋진 시닉드라이브 도로다. 그리고 도로 중간의 폭포 앞 전망대는 또 다른 풍치를 선사한다. 올레순으로 돌아가는 길. 도로는 피오르의 물가를 따랐다. 아무리 둘러봐도 도로와 주택, 농장 외에는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없는 완벽하고 깨끗한 노르웨이의 피오르. 올해 노르웨이가 해외관광 마케팅 슬로건으로 채택한 ‘자연의 힘으로(Powered by Nature)’는 이런 모습을 완벽하게 담아낸 표어다. 노르웨이=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여행정보| ◇찾아가기 ▽올레순 △항공: 6월 1일부터 런던 직항편 운항(월·금요일) △육로: 오슬로∼돔보스(4시간 소요·철도), 돔보스∼온달스네스(114km·라우마 철도), 온달스네스∼올레순(107km·시외버스) △해로: 베르겐에서 오후 7시 후르티루텐 여객선에 오르면 이튿날 오전 9시 도착 ▽예이랑에르 피오르=올레순이 관문 △해로: 오전 9시 30분 후르티루텐 여객선에 오르면 오후 1시 30분 도착 ◇후르티루텐=침실과 레스토랑, 바를 갖춘 준 크루즈 연안여객선. 베르겐∼키르케네스(노르웨이반도 북쪽)를 운항(4월 15일∼9월 14일)하며 곳곳에 선다. www.hurtigruten.com ◇현지관광 프로그램=올레순 항구의 Magic Fjord Sightseeing(www.fjord-magic.com)에서 예이랑에르 피오르 투어 등 다양한 상품을 판매 ▽피오르 익스피리언스=후르티루텐 여객선으로 예이랑에르 피오르 관광 후 버스로 돌아오는 하루 일정(9시간 15분 소요). 6월 27일∼8월 17일, 790크로네(약 17만 원). 4∼16세는 50% 할인 ▽일조시간 및 기온=6월 오슬로의 경우 △일출 오전 4시 7분 △일몰 오후 10시 24분. 기온은 10∼20도 ◇웹사이트 ▽올레순=www.visitalesund.com ▽예이랑에르 피오르=www.visitgeirangerfjord.com ▽온달스네스=www.visitandalsnes.com ▽페리선박=www.fjord1.no ▽버스=www.timeekspressen.no ▽스칸디나비아 관광청 한국사무소=www.stb-as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