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 명소인 홍콩이 예술 쇼핑의 천국으로 바뀌고 있다. 지난달 홍콩에선 첫 국제아트페어가 열렸다. 이어 열린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크리스티가 홍콩에서 경매를 연 지 20년 만에 처음으로 ‘이브닝 세일’을 도입했다. 뉴욕, 런던과 마찬가지로 이번 이브닝 세일은 스타 작가의 작품 30여 점을 모아 놓고 VIP 고객을 따로 초대해 비공개로 진행했다. 홍콩 경매에 대한 크리스티의 자신감 표출이라고 할까. 홍콩이 예술 쇼핑객을 끌어 모으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예술쇼핑 중심지로 부상
● 아시아의 유일한 국제적 경매 현장
지난달 24일 오후 7시 40분 홍콩 완차이구 하버로드 컨벤션센터의 홍콩 크리스티 경매장. 경매사 앤드리아 피우친스키 씨가 단상에 섰다. 아시아에서 가장 생동감 있는 미술거래 현장인 홍콩 크리스티 경매 중 이브닝 세일이 시작된 것이다.
“360만 홍콩달러 안 계십니까? 감사합니다. 380만 홍콩달러 안 계십니까? 감사합니다.”
중국 현대미술의 간판스타 중 한 명인 장샤오강 씨의 ‘동화’가 화면에 떠 있는 동안 1000여 명의 참가자들은 빠르게 번호판을 들었다가 내렸다. 가격대는 최고 예상가(300만 홍콩달러)를 넘어선 지 오래다.
경매에 참가하지 않아도 경매 현장은 재미있다.
여러 사람이 입찰에 응하지만 남는 건 딱 두 사람이다. 경매사가 “한 번만 더 부르시면 낙찰된다”며 은근히 구매심리를 자극하거나 의도적으로 경쟁을 부추긴다. ‘이제 경쟁이 모두 끝났구나’ 하는 순간에 전혀 다른 사람이 허를 찌르며 참가한다. 이 때문에 사그라지던 불씨가 다시 피어날 때도 있다.
해마다 거품 논쟁이 있었던 중국 현대미술 중에서 어떤 작가가 크게 대접받는지, 어떤 작가는 거품이 빠지는지 확인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번 경매에서는 중국 스타 작가 쩡판쯔 씨의 1996년 작 ‘마스크 시리즈 6번’이 예상가의 4배가 넘는 7536만 홍콩달러(약 105억 원)에 팔렸다. 반면 정교한 조각과 화학류를 사용한 프로젝트로 유명해 중국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도 초대받은 카이궈창의 용을 형상화한 드로잉 작품은 예상 가격에 턱없이 못 미쳐 유찰됐다.
홍콩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크리스티와 소더비가 경매를 여는 도시다. 홍콩에서 경매가 열리는 시기는 4, 5, 10, 11월로 1년에 4번이다. 경매일은 통상 1주일 정도. 우는 어린애를 업고 오는 주부, 경매 도중 휴대전화로 크게 통화하는 사람들이 간간이 있어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가장 각광받는 미술품을 보려면 이 경매를 놓쳐선 안 된다.
경매도 경매이지만 그에 앞서 열리는 프리뷰는 미술 전시회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가 볼 만하다. 경매에 나갈 작품을 미리 선보이는 행사로 요즘 잘나가는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통상 크리스티나 소더비가 프리뷰를 열면 다른 경매 회사들이 위성행사를 여기저기서 연다.
이번에도 크리스티가 22∼24일 프리뷰를 여는 동안 홍콩컨벤션센터와 붙어 있는 그랜드하이엇홍콩호텔에서는 한국의 서울옥션, 대만의 라베넬(Ravenal), 킹슬리(Kingsley), 중청이 각각 프리뷰를 열었다. 웨민준, 왕광이 등 히트 작가들의 작품이 겹치기도 했다.
크리스티는 프리뷰를 위해 무려 5600m²가 넘는 행사장을 빌려 총 1500여 점의 작품을 내걸었다. 세계적인 미술관 규모다. 어린 아이를 데려온 부부, 친구들끼리 온 중년 주부, 공책에 무언가를 적느라 바쁜 20∼30대, 여행 온 듯한 서양인들로 붐볐다.
6, 7세인 딸과 아들을 데리고 온 영국 관광객 니겔 헤일(49) 씨는 “전시 규모가 크고 작품이 많아서 홍콩에 머무는 동안 매일 애들을 데리고 와서 보겠다”고 말했다.
서울옥션은 다음 달 중 홍콩에 현지법인을 세우고 중국의 양대 미술품 경매회사인 바오리(保利)와 제휴해 1년에 두 번 공동경매를 진행하기로 했다. 홍콩에서는 아시아 작가의 작품만 내놓는 크리스티나 소더비와 달리 서양 작가를 포함한 다양한 작품을 내놓을 계획이다.
● 날개 펴는 국제아트페어, 신진예술가의 산실 아티스트 레지던시
경매만 홍콩 예술의 전부는 아니다. 올해 처음 열린 국제아트페어와 신진 예술가가 먹고 자며 작품 활동을 한 뒤 작품을 내거는 아티스트 레지던시들도 가 볼 만하다.
컨벤션센터에서 14∼18일 열린 국제아트페어에는 가나아트갤러리, 갤러리현대, 학고재화랑, 금산갤러리 등 한국의 주요 13개 갤러리가 참여했다. 여기에 참여한 갤러리 수는 총 100여 개.
금산갤러리 조현아 큐레이터는 “홍콩아트페어가 비록 1회였지만 아시아만 아니라 영국 등 세계에서 수준 높은 갤러리들이 좋은 작품을 들고 찾아왔다”며 “뉴욕 브리지 아트페어보다 수준이 높았다”고 말했다.
아트페어에 참가한 한국 갤러리들은 내놓은 작품 대부분을 팔았다. 가나아트갤러리는 배병우, 안성하, 이정웅 등 가져간 국내 작가 10여 명의 작품을 모두 팔았고 해외 작가들의 작품만 일부 유찰돼 판매율이 80%라고 밝혔다.
가나아트갤러리 국제부 이장은 대리는 “그동안 해외 아트페어에 많이 나가봤지만 오는 손님들이 연령대나 국적이 다양하기로는 홍콩이 으뜸”이라며 “하루에 500∼1000명이 부스를 찾아왔으며 단순히 작품이 좋아서 구경하는 사람, 공부하는 사람, 작품을 사가는 사람 등 찾는 목적도 다양했다”고 전했다.
홍콩아트페어를 다녀온 사진작가 배병우 씨는 “2회부터는 더 많은 갤러리가 참가하고 싶어 할 것이며 갤러리 간 경쟁도 심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이 행사는 내년에도 비슷한 시기에 열린다.
홍콩에서 젊은 작가들의 실험 정신이 가득한 작품들을 감상하려면 가 볼 만한 곳이 몇 군데 있다.
소호지역과 쿤통에 있는 오사주(Osage) 갤러리는 작가들이 와서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하는 ‘아티스트 레지던시’다.
이곳은 작가들에게 숙식 공간을 무료로 제공해주는 대신 창작 활동의 결과물을 넘겨받아 전시해 갤러리를 운영한다. 갤러리 입장은 공짜다.
패러사이트(Parasite)나 원에이도 비슷한 장소다. 주로 유명해지기 전의 ‘배고픈’ 젊은 작가들이 찾아온다.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 중국관에 뽑힌 4명의 여성 작가 중 한 명인 차오페이도 패러사이트 출신이다. 홍콩 대만 출신 작가들이 많다.
홍콩=하임숙 기자 artemes@donga.com
▼홍콩이 각광받는 이유▼
중국 현대미술 기세등등
영어사용-세금혜택 매력
홍콩이 각광받는 이유는 중국 현대미술의 기세가 무섭기 때문이다. 덕분에 일본, 한국 작품까지 인기다. 이번에 프리뷰를 연 대만의 최대 경매회사인 라베넬은 옥션 소개 책자에 ‘일본과 한국 현대미술’을 제목으로 뽑아두기까지 했다. 중국의 바통을 어느 나라가 이어받을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데님으로 한국 거리의 풍경을 묘사하는 최소영, 책장을 치밀하게 묘사한 ‘서재’ 시리즈로 유명한 홍경택, 독특한 모자이크 작품으로 유명한 김동유 등 이미 뜬 한국 작가들은 여전히 인기다. 하지만 각광받는 한국 작가의 폭이 넓지 않은 게 단점이다.
반면 일본은 부동산 거품기를 거치면서 초토화된 미술시장이 이번에 확실히 부활의 신호탄을 쏘았다. 히사시 덴뮤야가 아크릴에 그린 로봇 건담 등 만화캐릭터를 그대로 옮겨놓은 장난 같은 작품들이 6억 원이 넘는 고가에 팔렸다.
서울옥션 박혜경 이사는 “현대미술에서는 소재보다는 창의성이 돋보이는 작품이 더 좋은 평가를 받는다”고 말했다. 아시아 미술 시장이 커지면서 한동안 베이징과 상하이가 치열한 주도권 다툼을 벌였다. 갤러리들이 우후죽순 생긴 것도 아트페어를 경쟁적으로 유치한 것도 이들 두 도시였다.
하지만 동양과 서양이 묘하게 섞여 있고 영어가 통하는 데다 무엇보다 세금 혜택 조건이 월등한 홍콩이 그 왕좌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베이징이나 상하이가 중국 작가들의 작품 비중이 월등히 높은 데 반해 홍콩에서는 작품들이 다양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진수 강남대 경제학부 교수는 “세계 미술시장을 선도하는 뉴욕, 런던, 파리 이후 차세대 리더의 자리를 놓고 여러 도시가 경쟁하고 있다”며 “시내에서 공항이 가깝고 세금 혜택이 좋아 물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홍콩이 아시아 허브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