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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임성호]정치인이 정치를 포기하나

입력 | 2008-06-13 04:01:00


정치인은 정치를 하는 것이 본분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의외로 실천하기 어려운가 보다. 오늘날 한국 상황을 보면 정치인 직함을 내걸 수 있는 사람은 많으나 정치는 보이지 않는다. 정치 포기의 시대가 진행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부터 보자. ‘CEO 대통령’을 표방하며 경제 발전을 만병통치약으로 여긴 탓에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정치는 뒷전으로 밀어버렸다. ‘탈여의도’ 기치 아래 대통령은 국내 갈등을 초월하는 존재라고 잘못 생각한 탓에 정치를 등한시했다. 정책으로 승부하면 정치라는 늪을 무난히 건너뛸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것 같다. 대통령의 그늘에 있을 수밖에 없는 한나라당도 탈정치 대열에 합류했다. 18대 총선을 위한 공천을 신입사원이나 하위공무원 뽑듯이 했다. 총선이 끝나자 여러 당선자가 입당 의사를 공표했지만 대통령 눈치 때문인지 도덕적 결벽증 때문인지 선뜻 받지 않고 있다.

통합민주당도 마찬가지로 정치를 포기한 듯하다. 대통령과 한나라당에 맞설 상대자로 중심을 잡고 정치의 한쪽을 주도하는 모습과 거리가 멀다. 국회 등원은 잊고 장외에서 이익단체와 여론을 우왕좌왕 따라가느라 정신없다. 시민사회단체의 자원(自願) 방계조직 같다.

꼬인것 풀고 막힌것 뚫는게 本業

정치인이 정치를 포기하는 것은 정치를 나쁘게 보는 사회풍조에 영향 받은 바 클 것이다. 정치인들의 자업자득이지만 일반인에게 정치는 흥정, 술수, 야합, 합종연횡, 변절 등 부정적 이미지로 다가온다. 신뢰도 조사를 보면 정치와 정치권이 최하위를 늘 맡아 놓고 한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민감한 정치인으로서는 정치를 방기하는 태도를 취해야 득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정치인 스스로가 정치적이라는 수식어를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 역설적이다.

그러나 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정치 자체와 정치인들의 그릇된 행태를 혼동한 결과이다. 정치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데 꼭 필요하다. 정치의 의미를 다양하게 정리할 수 있지만, 쉽게 말해 꼬인 것을 풀고 막힌 것을 뚫는 것이 정치이다. 수많은 사람이 부대끼고 어우러지는 민주적 사회에서 이견과 갈등은 자연스럽다. 사회가 커질수록 이해관계도 복잡해져 합의가 힘들고 교착, 대립으로 빈번히 이어진다. 이때 필요한 것이 정치이다.

정치의 핵심은 대화에 있다. 꼬이고 막힌 것을 풀고 뚫으려면 이해 당사자들이 의사소통을 중시해야 한다. 그래야 타협과 양보와 조정을 이룰 수 있다. 이 핵심적으로 중요한 대화는 상대방을 전제한다. 혼자 일방적으로 외치고 뜻 맞는 사람들과만 어울리며 상대방을 경청하지 않거나 아예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 정치가 가능하겠는가. 지난 몇 달간 대통령과 각 정당이 정치를 포기했다는 말은 일방적 계획, 수사적 구호, 맹목적 비판에만 몰두했지 상대와의 대화를 중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촛불집회로 절정에 달한 총체적 난국과 정치 실종을 정치인들만의 탓으로 돌릴 수는 물론 없다. 언론과 시민단체들도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언론은 좌우 양쪽 이념으로 편향돼 중립성의 규범을 망각하고 센세이셔널리즘에 사로잡혀 중용의 미를 잃은 지 오래다. 여러 시민단체들도 좌든 우든 경직된 이념과 절대주의적 사고에 빠져 자기주장만 외쳐대고 자기반성의 성찰은 잊은 듯하다. 탈산업의 전환기를 맞아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리는 대중은 유행처럼 예측할 수 없게 나타나는 집단주의적 적대감을 통해 심리적 위안을 얻으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대화로 조정을 시도하는 행위, 즉 정치를 실천하기 쉽지 않은 사회 상황이다.

대통령도 與도 野도 정치 경시

이렇게 어려운 사회 상황에도 불구하고 조정을 성취하는 것이 정치이다. 그것은 결국 정치인들의 몫이다. 정치인들로서는 언론, 시민단체 그리고 일반 국민이 야속할 것이다. 도저히 정치를 할 수 없는 사회 상황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원망할지 모른다. 그러나 언론, 시민단체, 시민은 각종 이익과 입장을 쏟아내는 것을 본분으로 한다. 너무 일방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지만 다양한 이익 표출이 그들의 할 일이다. 때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무리하고 과도한 이익 표출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대립을 막고 교착을 풀어야 하는 난제, 그것이 바로 정치이고 정치인들의 본분이다. 힘들다고 정치인이 정치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임성호 경희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