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6월의 시민항쟁이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였다면, 2008년 6월의 촛불시위는 민주주의의 내용을 채우라는 요구다. 21년 전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겠다’던 국민은 이제 대통령 직선(直選)에 만족하지 못한다. 대통령과 정부가 ‘주권자인 국민의 뜻에 따를 것’을 요구한다. 자신들에겐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이 한미 정상회담에 맞춰 졸속으로 처리한 쇠고기 협상을 다시 하라고 한다. 재협상으로 국민의 건강권과 검역주권을 보장하라고 한다.
식탁을 떠난 ‘촛불’
국민을 섬기겠다는 대통령으로서는 거부하기 어려운 요구다. 그러나 대통령은 “지금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재협상 얘기를 해서 경제에 충격이 오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국민의 요구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그 점을 국민에게 소상하게 설명하고 설득했어야 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변명과 허술한 논리, 불필요한 말은 국민의 속만 뒤집어놓았을 뿐이다.
노무현 정부 탓을 할 게 아니라 틈이 벌어진 한미동맹의 복원(復元)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위해 쇠고기 협상을 서둘렀다고 했어야 했다. 쇠고기 협상과 한미 FTA는 별개의 문제라는, 아무도 믿지 않을 소리를 할 게 아니라 미국 의회가 쇠고기 문제를 FTA 비준의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는 현실을 설명했어야 했다. 배후세력이 누구냐고 하기 전에 단체급식을 불안해하는 중고교생과 학부모의 심정을 헤아렸어야 했다. 촛불 값은 누가 내느냐고 하기 전에 촛불 민심에 귀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그러나 다 지난 얘기다. ‘촛불’은 이미 식탁의 문제가 아니다. 생활의 문제로 시작된 촛불집회는 어느새 정치 집회의 성격으로 변질됐다. 경제 사회 교육 공공 분야에 걸친 이 정부의 모든 정책이 ‘이명박 아웃(out)’의 구호 속에 비토되고 있다. 변질된 촛불은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신뢰를 잃은 대통령과 정부, 기능을 상실한 정당정치는 촛불을 끄게 할 동력을 잃었다. 대의(代議)민주주의의 위기다. 국가공동체의 위기다.
우려되는 것은 촛불의 인화성(引火性)이 반미(反美)로 급격히 옮겨갈 수 있다는 점이다. 촛불시위 참가자는 물론 전문가, 대학 교수, 여당 의원들에 이르기까지 상당수가 왜 재협상을 못하느냐고 주장한다. 재협상을 해서 광우병 불안도 없애고 상처받은 국민의 자존심도 회복시켜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문제 해결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필자 또한 재협상을 하면 좋겠다. 그러나 협상에는 상대가 있는 법이다. 협정문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기왕의 협상은 없던 일로 하자는데 선선히 ‘까짓것 그럽시다’라고 할 상대가 있겠는가. 미국 측은 이미 ‘재협상 불가(不可)’를 분명히 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쇠고기 재협상을 선언하고 미국 정부가 기존의 입장을 바꾸지 않는다면 촛불 민심은 대번에 반미로 쏠릴 개연성이 높다. 사회 일각의 반미 세력들이 활개를 칠 것이고, 한국 사회는 다시 지긋지긋한 친미-반미의 자해적(自害的) 싸움판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한미 FTA는 물 건너갈 것이 뻔하다. 한미 간 통상마찰 속에 ‘전략적 동맹’도 껍데기가 될 것이다.
게도 놓치고 구럭도 잃는 이런 최악의 시나리오는 막아야 한다. 그 책임은 두말할 것 없이 대통령에게 있다. 대통령은 미국 측과 ‘추가협상’이 마무리되는 대로 직접 국민 앞에 나와 협상의 전후 사정을 소상히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한다. 사실상 ‘재협상’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소리나 되풀이해선 안 된다. 자칫 파국으로 갈 수도 있는 재협상의 위험성을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진지하게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국민 건강을 지켜내겠다는 약속을 국민이 믿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통령 자리를 걸고, 국민을 납득시키고 신뢰를 얻는다는 비장한 각오로 임해야 한다.
‘萬事兄通’이면 끝장이다
국민의 믿음을 얻자면 그에 앞서 인적 쇄신부터 철저하게 해야 한다. ‘박근혜 총리설’은 적절치 않다. ‘친이(親李)-친박(親朴) 갈등 해소용’으로 비칠 수 있다. 그렇게 여유로울 때가 아니다. 국민이 ‘대통령이 정말 변했다’라고 감동할 수 있는 인사를 해야 한다. 여전히 ‘만사형통(萬事兄通)’이라는 소리가 들린다면 그야말로 끝장이다.
국정의 우선순위를 민생 경제에 두고 거기 집중해야 한다. 다른 데 신경 쓸 여력도 없지 않은가. 국민의 신뢰부터 회복해야 한다.
전진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