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중론은 개인과 사회가 자신을 성찰할 기회를 얻고 위험사회에서 속히 책임사회로 이동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웬일인지 우리는 발이 꽁꽁 묶여 있는 실정이며 모두 자유롭지가 못하다.
재난 극복 화답하는 자연의 선물
세상을 바꾸려는 작은 촛불의 광원 저 먼 곳의 태안반도에서 자기 치유와 복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난 추운 겨울 바다돌에 눌어붙은 기름을 천으로 닦아내던 손길들은 지금 어디서 자신의 일상에 충실하고 있을까. 다시 한 번 태안에서 그들이 만난다면 새로운 촛불바다 축제가 될 것이다.
지금은 한여름, 온 세상이 태양과 바다와 녹음의 계절이다. 삶의 현장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사람들을 기억한다. 곤경에 처해 있어도 ‘함께한다’는 아주 상투적인 이 외침 속의 커다란 에너지가 바로 재난을 극복하게 했다.
뜨거운 여름이 찾아왔다. 아이들 손을 잡고 함께 필터마스크도 착용하지 못해 가려운 눈을 비비던 그 손으로 어린 농게를 만져볼 수 있을까. 그것을 살짝 물결의 미세한 흙모래에 띄워 보내는 여유를 내 딸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생명을 가르쳐줄 수 있고, 그것이 우리의 한 고달픈 시절의 혹은 먼 어린 날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저장될 수 있을까. 태안이 간직한 많은 이의 기억을 재생해보고 그 현장으로 떠나는 여행은 자연과 인간의 친밀성을 강화하고 또 다른 의미의 프리즘을 선사받게 된다.
자연의 선물을 증여받고 사는 나를 바다 가장자리에 데려가는 것은 나에 대한 배려이며, 오롯한 무위의 시간을 선물하는 행위이다. 이 선물은 인간이 자연에게 갚을 수 있는 은혜가 아니다. 다만 깊게 깊게 우리 삶의 주름 속에 태양의 빛을 담아주면서 의미를 찾는 감사의 기회를 가질 뿐이다. 나는 이러한 시간을 이번 여름에 태안에서 가지려 한다. 나는 그 고유한 휴식을 위하여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 그 비용을 이번 여행에 아낌없이 쓰려 한다.
나는 이미 태안반도의 모래톱에 나를 누이고서 비치파라솔 밑에 앉아 있는 아이를 바라본다. 너를 키운 것은 내가 아니라 저 자연이다. 저 바깥의 것들이란다, 하고 나에게 속삭인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저 바깥의 것들을 내다보며 그것들의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대로 놓아둔다. 자연은 우리 몸에 자신을 기록하고 남기며 내 몸도 어느새 그 자연을 닮아간다.
환경적 재난이 사회적 재난의 문제로 발전하는 기름 유출 사고의 깊은 상처는 아직도 태안 곳곳에 남아 있다. 하지만 태안 일대에선 지금 한산모시문화제, 백합꽃축제, 감자 캐기, 백합꽃빵 만들기, 봉숭아 물들이기 등 다양한 체험행사도 열린다. 또 27일 만리포해수욕장을 시작으로 서해의 모든 해수욕장이 개장을 한다.
다만 모두가 기름 유출 사고 극복에 동참한 백만 봉사자들의 고마움에 화답하면서 지역경제를 살리고 주민의 고달픔을 위로하는 이 행사가 또 다른 갈등과 소외를 만들어선 안 된다. 피해보상 문제에 따른 지역주민들의 갈등,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등의 건강 문제와 생태복원을 위한 체계적인 시스템이 갖추어져야 한다.
지역경제 살리고 주민 위로하자
5월 31일 ‘바다의 날’에 피해자들이 삼성중공업 거제본사 정문 앞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초대형 크레인의 충돌 부분에 ‘WORST OIL SPILL’이란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아직도 태안의 기름 유출 사고가 다 해결된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산적한 문제 속에서도 그러나 나는 내가 좋아하는 태안반도의 쓸쓸한 저녁바다에 젖고 싶다. 모든 생명이 환희 작약하는 한여름의 태양 속에서 나는 조용한 바다를 향해 서늘한 해풍에 몸과 정신을 맡겨두고 싶다. 저 순수 대자연이 지닌 무위의 시간들 앞에 온 마음을 놓아주고 싶다.
고형렬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