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정재영은 가족들과 차를 타고 서울 강남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그때 영화 ‘강철중:공공의 적 1-1’(이하 ‘강철중’)의 거대한 포스터가 무심코 눈에 들어왔다. 한 극장 건물 외벽을 휘감고 있던 그 포스터에는 강철중 역 설경구와 함께 한 남자가 웃고 있었다. 정재영은 그 남자를 보며 “참 야비하게도 생겼다”고 무심결에 말했다. 온 가족이 침묵한 지 몇 초. 정재영은 그 남자가 바로 자신이며 ‘강철중’의 새로운 ‘공공의 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참, 제가 봐도 정말 재수없게 생겼더라고요. 처음에 ‘쟤 누구야?’ 그랬습니다.”
사실 본인만 그런 건 아니다. ‘아는 여자’의 사람 좋은 동치성, ‘바르게 살자’의 순진한 교통순경 정도만, ‘웰컴 투 동막골’의 선량한 인민군 장교 리수화 등 정재영은 ‘나쁜 놈’과 거리가 멀었다.
간혹 맡은 역할이 깡패일 때도 있었고, 킬러인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나쁜 직업을 갖고 있는 착한 사람’이라는 독특한 재미를 줬지 악역 그 자체로는 비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악역의 대명사 ‘공공의 적’이 됐다. 정재영은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스스로 생각해도 참 나쁜 놈이었다. 촬영 기간 내내 내가 그 사람 같아 불쾌하고 기분이 나빴다”고 말했다.
19일 ‘강철중’의 개봉을 앞두고 제작사 KnJ엔터테인먼트의 사무실에 만난 정재영은 전과 다름없는 사람 좋은 미소로 웃었다. 영화 속 고등학생들에게 칼을 쥐어주고 살인범으로 만드는 거대 조직의 보스 이원술의 야비한 미소는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사실 속아서 출연한 것도 있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역할을 꼭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 속아서 출연했다니?
“지난해 지방에서 ‘신기전’을 오랜 시간 촬영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강우석 감독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재영아! 나랑 코미디 영화 하나 하자.’ 그래서 흔쾌히 ‘예’ 그랬다. 그리고 며칠 후 사람들이 묻기 시작하더라. ‘너 공공의 적’ 한다며?’ ‘그렇다면 분명 강철중은 (설)경구형이고 그럼 내가 공공의 적?’ 그런 생각하며 서울로 올라왔다. 강 감독께 물었더니 ‘응. 그 코미디가 ‘공공의 적’이야’라고 말하며 웃었다. 이왕 하기로 한 거고 또 지독한 악역도 꼭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했기 때문에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 그 동안 쌓아온 ‘좋은 사람’의 이미지도 있는데 걱정은 되지 않았나?
“쌓아온 이미지도 없고 지켜온 모습도 없다. 지독한 악역은 몇 해 전에 할 기회가 있었는데 자신감이 없어 하지 못했다. 그 영화가 바로 ‘공공의 적2’다. 강우석 감독이 함께 하자고 했는데 시나리오를 읽어보며 과연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그런 의문이 생기더라. 강 감독께 죄송하다고 했다. ‘강철중’은 시나리오가 완성되기 전에 출연을 결정해서 각본을 쓴 장진 감독과 강우석 감독이 제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잘 만들어주신 것 같다.”
- ‘강철중’에 대한 반응이 매우 좋다. 하지만 한 쪽에선 ‘공공의 적’ 역할인 이원술이 너무 멋지게 그려진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정말 나쁜 놈이다. 영화를 보면 정말 아직 한참 공부할 아이들을 시켜 살인을 저지르는 지독한 나쁜 놈이다. 촬영을 시작한 뒤 이원술의 옷을 입고 연기하며 기분이 나빴다. 마치 그가 나 같아서 불쾌했다. 이원술이라는 한 캐릭터에 집중하기보다는 그 깡패 집단 전체를 ‘공공의 적’으로 표현해 일부 그런 지적이 있을 수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스스로 멋지거나 매력적으로 캐릭터가 느껴지지 않았다. 연기하고 있으면 자꾸 제가 나빠지는 것 같고, 스스로 자기를 합리화시키는 이원술의 모습에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미친 놈 또 뻥치고 있네’ 이런 맘도 들었다.”
- 대사가 길다. 장진 감독 특유의 유머에 강우석 감독의 색깔이 진하게 들어간 새로운 스타일, 거기에 친숙하지 않은 악역까지. 어려움은 없었나?
“대사가 정말 길었다. 지금까지 했던 영화는 대부분 대사보다는 행동 위주였다. 나쁜 놈이 뭔 그리 말이 많은지.(웃음) ‘신기전’을 오래 촬영하고 서울에 와서 시작했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스태프들이 ‘실미도’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이라 격려도 많이 해주고 도움도 줘서 무사히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이성재, 정준호에 이어 세 번째 ‘공공의 적’이 됐다. ‘공공의 적’ 시리즈를 어떻게 생각하나?
“솔직히 경구형이 참 부럽다. 내게도 한 10년은 먹고 살 수 있는 이런 시리즈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웃음) 제목 하나만으로 수십, 수백배 제작비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맞설 수 있는 시리즈다. 영화 제목을 갖고 일반 사람들부터 정치인까지 사용하고, 사자성어가 된 것 같다. 최고의 제목이다. 사실 1편이 개봉했을 때 저는 주인공 ‘공공의 씨의 적’인 줄 알았다(웃음). 관객들의 사랑을 계속 받는 ‘공공의 적’ 시리즈로 이어졌으면 한다.
▲배우 정재영은…
1970년에 태어나 장진 감독, 임원희, 신하균과 어울리며 서울예대에서 연기를 공부했다. 장진 감독의 ‘페르소나’(감독의 의중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배우)로 불리며 다양한 작품을 함께 했다. 서울 출신이지만 배우 김지영과 함께 전국 8도 사투리를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로 꼽히기도 한다. 1990년대 5∼6편의 영화에서 단역으로 얼굴을 내보이기 시작, 1999년 ‘간첩 리철진’, 2001년 ‘킬러들의 수다’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2002년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선굵은 연기를 펼치더니 2003년 ‘실미도’로 1000만 관객을 끌어들였고, 2004년 ‘아는 여자’로 멜로 주인공까지 됐다. ‘웰컴 투 동막골’, ‘거룩한 계보’, ‘바르게 살자’까지 다양한 영화를 성공시켰다. ‘강철중’에 이어 단독 주연을 맡은 대형 액션사극 ’신기전‘의 하반기 개봉을 앞두고 있다.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사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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