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와 베니토 무솔리니.
각각 독일어와 이탈리아어로 지도자를 뜻하는 ‘퓌러’와 ‘두체’로 불린 두 독재자는 서로를 끊임없이 경멸과 감탄이 뒤섞인 눈초리로 바라본 운명적 경쟁자이자 협력자였다.
정치활동 초기 히틀러에게 무솔리니는 우상과 다름없었다. 그는 곧잘 무솔리니를 선구자라고 불렀다. 뮌헨의 나치 본부 안 히틀러의 집무실에는 무솔리니의 반신상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히틀러를 일개 하사관 출신의 벼락출세자, 천박한 협잡꾼으로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독특한 개성에 매료되고 말았다. 자신을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세계 일류의 정치가”라고 칭송하는 히틀러에 홀딱 반해 버렸다.
이렇게 두 사람의 ‘강철 동맹’은 맺어졌지만 무솔리니는 1940년 6월 10일 이미 독일이 서부전선을 격파해 프랑스의 항복이 분명해진 시점에야 연합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더욱이 이탈리아군은 최소한의 체면치레도 하기 전에 국경도시 망통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하지만 무솔리니는 비록 군사력에선 밀리지만 스스로를 ‘독재자 클럽’의 좌장이라 여겼다. 히틀러가 선배의 경험과 의견을 존중할 것으로 기대했다. 이런 무솔리니의 자존심은 금세 뭉개졌다.
6월 18일 뮌헨에서 히틀러를 만난 무솔리니는 자신이 한낱 ‘2인자’로 취급되는 현실을 깨닫고 깊은 실망감에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무솔리니는 이번 전쟁에서 ‘엑스트라’ 역할을 해준 대가로 프랑스 남부와 코르시카, 튀니지, 지부티는 물론 시리아, 알제리까지 영토권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휴전협상을 염두에 둔 히틀러는 냉정하게 무솔리니의 모든 야심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배석했던 무솔리니의 사위 갈레아초 치아노 외교장관은 이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히틀러는 정말 깜짝 놀랄 정도의 절제와 명료함을 지닌 태도로 말한다. 그에 대해 특별히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이 순간 정말 그의 태도에 경탄하게 된다.”
이날 확인된 두 사람의 권력 관계는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다. 치아노는 훗날 “우리는 결코 파트너로 대우받지 못했다. 단지 노예였다”고 회고했다. 독일이 모든 정책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긴 뒤에야 이탈리아는 이를 사후 통보받을 뿐이었다.
히틀러에게도 그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그는 무솔리니 주변을 의심했다. 그는 한때 “무솔리니에게 보내는 정보는 곧바로 영국으로 간다. 영국에 알릴 게 있으면 무솔리니에게 보내면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