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아 반지 사줄까?”
척 보면 안다. 다이아몬드 반지 운운하며 청혼하려는 저 남자, 그윽한 눈빛을 보라. 옆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 이 행복한 순간에 못 이기는 척, 그냥 고개만 끄덕이면 게임 끝이다. 그러나 이 여자, 너무 솔직한 나머지 다이아 반지를 내팽개쳤다.
“아니, 초대형 신발장으로. 거기에 새로 나온 명품 구두를 채워 넣고 싶어….”
청혼하는 남자 친구 앞에서 반지 대신 명품 구두라니. 그것도 ‘신상(신상품) 구두’를…. 그런데 두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그렇다. 5일 개봉한 영화 ‘섹스 앤드 더 시티’. 명품 구두를 목숨보다 더 아끼는 캐리 브래드쇼(세라 제시카 파커)와 그의 오랜 남자 친구 미스터 빅(크리스 노스) 아니던가.
현실은 어떨까?
“신상? 완전 좋죠. 내가 유행을 선도한다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직장인 송미령(27) 씨는 3주에 한 번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과 청담동 명품매장에 들러 신상품 쇼핑을 한다. 송 씨가 신상품 쇼핑을 시작한 것은 7년 전. ‘S/S(봄/여름)’, ‘F/W(가을/겨울)’ 등을 따지며 신상품에 관심 많은 남자 친구를 만난 뒤부터였다. 우연히 남자 친구와 함께 들른 명품 브랜드 페레가모 매장에서 신상품 구두를 소개받은 송 씨는 “할머니 신발 같다”며 마음을 주지 않았지만 남자 친구의 권유로 큰맘 먹고 구두를 샀다. 그날 이후 송 씨는 주변에서 하나 둘 자신과 똑같은 구두를 신고 다니는 것을 발견했고 이후 신상품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 그렇게 7년간 모아온 신상품은 가방, 구두, 지갑 등을 합쳐 총 100여 개. 자신에게 ‘찍힌’ 신상품은 일본, 홍콩까지 나가 직접 공수하는 것은 기본이고 친구에게 돈을 꿔서라도 손에 넣어야 한다.
만만찮은 비용을 해결하기 위해 송 씨는 얼마 전부터 자신의 이름으로 된 통장 하나를 만들었다. 이름은 ‘신상통장’이다. 매달 월급에서 일정액을 저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는 ‘얼마나 빨리 사느냐’가 쇼핑의 가장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죠. 꼭 사야 하는데 돈이 없으면 얼마나 슬퍼요.”
○“신상을 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들의 정보 전쟁 24시
잇 백(It bag)이 삶의 최고 화두가 된 직장인 정유선(가명·30) 씨. 오늘도 그는 영국, 프랑스발(發) 외국잡지를 보며 신상 가방은 없는지, 시에나 밀러와 케이트 모스의 파파라치 컷 속 잇 백은 뭔지를 꼼꼼히 본다. 그러다 신상품이 포착된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비상벨이 울린다. 가방 이름과 생김새를 파악한 후 브랜드의 국내 매장에 전화를 걸어 수입 현황을 살핀다. 국내 발매 계획이 없으면 ‘뉴욕 5번가’ 같은 해외구매대행 사이트에 접속해 구매한다. 그것도 안 되면 해외 본사로 직접 전화해 수량을 파악한다. 마치 ‘인터폴’ 수배하듯 전 세계 신상 가방 수배령을 내리는 정 씨. 그렇게 잇 백을 좇은 지 3년째, 그는 어느덧 색깔만 다른 같은 디자인의 신상품 가방을 2, 3개씩 사는 경지에 이르렀다. 돈을 모으기 위해 증권 투자까지 하면서 신상 가방을 사는 이유를 묻자 정 씨는 “오로지 내 만족”이라고 말했다.
글=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지면디자인=공성태 기자 coonu@donga.com
남친보다 다이아보다 신상이 좋아
‘신상’을 논하는 자리에 ‘신상 유출’, ‘신상명세서’의 ‘신상(身上)’을 얘기한다면 당신에겐 ‘쥬얼리’의 서인영도,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도 ‘흑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바뀐 만큼 신상의 정의도 바뀌었다. ‘신상품(新商品)’에서 ‘품’자를 뺀 단어로 통하는 시대, ‘신상 구두’, ‘신상 가방’이 연관 검색어로 각광 받는 시대다.
이 흐름을 주도한 주인공은 여성그룹 쥬얼리의 멤버 서인영이다. MBC ‘우리 결혼 했어요’, 케이블TV M.net ‘서인영의 카이스트’ 등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통해 그는 ‘신상 구두’를 “내 새끼”라며 발은 더러워져도 새로 산 구두는 티끌 하나 묻어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시청자들은 이런 그에게 ‘신상녀’라는 별명을 만들었다. 그로 촉발된 신상녀 캐릭터는 MBC 드라마 ‘달콤한 인생’의 홍다애(박시연), ‘올리브’ 채널 드라마 ‘악녀일기3’의 에이미 등으로 확산됐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정보력’이다. 국내 패션잡지도 늦었다 할 만큼 이들의 정보는 실시간이다. 할리우드 스타 파파라치 사이트나 패션쇼 모음 사이트 등 해외 패션 사이트가 이들의 온라인 정보통이다. 하지만 원하는 신상품을 얻기 위해선 온라인에 버금가는 오프라인 활동도 필요하다. ‘10꼬르소꼬모’, ‘분더숍’ 등 편집매장 위주로 신상품 쇼핑을 하는 직장인 이지선(27) 씨는 “수시로 매장을 방문해 신상품 입고 현황과 예약 대기자 명단을 확인한다”고 말했다.
신상품 쇼핑이 하나의 정보전쟁을 방불케 하는 것은 매장 점원과의 관계 유지에도 나타난다. 이 씨는 “점원과 친해지면 신상품 책자나 샘플, 심지어 대기자 순번 우선권까지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 번 ‘꽂히면’ 밤새 ‘뻗치기’도 마다하지 않는 ‘열혈파’ 신상족들. 의류, 잡화, 화장품, 심지어 보석까지 쇼핑 범위가 대부분 명품 브랜드에 치우친 만큼 이들의 큰 난점은 바로 비용 문제다. 이들은 소수 정예로 ‘신상 계모임’을 갖거나 신상 통장을 만들고 펀드에 가입하는 등 적극적인 방법으로 비용을 마련한다. 또 인터넷 중고 명품사이트에 사용하던 제품을 되팔아 신상품 비용을 마련하기도 한다. 학원 강사 유수양(27) 씨는 “신상 가방을 사기 위해 ‘투 잡’으로 친구와 함께 쇼핑몰을 운영해왔다”고 말했다.
○ “신상남도 잡아라!” VIP 대접하는 업계
신상족은 신상녀만? 천만의 말씀. 신상남도 있다. ‘나이키운동화 마니아’인 직장인 최진혁(25) 씨는 지난달 24일 조던 한정판 패키지인 ‘카운트다운’을 사기 위해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내 나이키 매장 앞에서 1박 2일을 보냈다. 박스를 깔고 노숙까지 하면서 신상품을 손에 넣은 최 씨는 “한 달 전부터 신상품 스케줄을 꿰뚫고 있다”고 말했다.
‘디올 옴므’의 양복, ‘랑방’의 스니커즈 등의 신상품을 매달 구입한다는 대학생 최준호(24) 씨는 신상품이 주로 들어오는 7∼9월, 12∼1월에는 일주일의 대부분을 브랜드 매장에 가서 보낸다. 그는 “신상품 구입은 패션뿐만 아니라 자신을 위한 투자”라고 말했다.
‘꽂힌’ 새 물건을 얻기 위해 발로 뛰는 신상족. 이들을 두고 업계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신상품 입고를 알리는 문자메시지, 안내책자 보내기를 넘어선 다양한 ‘신상족 마케팅’이 나타나고 있다.
명품브랜드 ‘셀린느’는 지난달 말 한 호텔에서 VIP 고객 중 신상족 100여 명을 초청해 가을 겨울 선보일 신상 모피와 악어백 70점을 미리 구매할 수 있게 한 ‘CAO(Customer Advanced Order)’ 이벤트를 열었다.
셀린의 권준희 차장은 “직원이 골라준 의상을 구매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의지를 갖고 능동적으로 쇼핑을 하는 시대가 왔다”고 말했다. 이른바 ‘브랜드 학습’이라는 마케팅을 하는 프랑스 패션브랜드 ‘루이카토즈’는 지역마다 30여 명의 신상족을 초청해 영화관 한 관을 통째로 빌려 신상품 설명회를 열고 있다. CRM(고객관계관리)팀 박규태 과장은 “신상족은 브랜드 충성도가 높은 능동적인 고객이자 새로운 고객 창출의 통로”라고 말했다.
백화점도 예외는 아니다. ‘프리비어스 쇼핑(사전 쇼핑)’ 마케팅을 하는 롯데백화점 본점은 3년 전부터 한 해 두 번 VIP 고객 중 신상족 400명을 초청해 ‘그들만의 쇼핑’ 자리를 마련해준다.
이날은 오후 5시가 되면 ‘애비뉴엘’관이 폐쇄되고 60여 개의 브랜드들은 매장에 없는 따끈따끈한 신상품을 내놓는다. 롯데백화점 오용석 매니저는 “평소 매출의 4배 이상을 올렸다”며 “최근에는 개인 매니저가 신상족 집에 찾아가 새 상품을 소개하는 ‘퍼스널 쇼퍼’ 제도도 만들었다”고 말했다.
○ 현명한 소비자? vs 이미지 게임?
연세대 황상민 교수(심리학)는 “소비행위가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도구가 됐다”며 “신상족은 인터넷 미니 홈피나 블로그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명품 스타일’보다 ‘명품 구매’ 자체를 더 알리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는 소비문화의 변화와도 맞물린다. ‘알파걸’, ‘골드미스’로 대표되는 여성들은 소비의 주체로 떠올랐고 명품에 비호의적이었던 남성들 역시 메트로섹슈얼, 크로스섹슈얼 등을 통해 ‘꾸미기’에 많은 소비를 하고 있다. 이런 변화를 주도한 것은 대중문화다.
섹스 앤드 더 시티가 여성들에게 최고 드라마로, 또 서인영이 당당하고 솔직한 ‘영웅’으로 비춰져 사람들은 신상족에 대한 ‘로망’을 꿈꾸게 된다. 문화평론가 김헌식 씨는 “신상품 쇼핑은 ‘놀이’와도 같다”며 “먼저 소유한다는 자체만으로 쾌감을 얻을 뿐 신상품 쇼핑의 도덕적 판단은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중 잣대’라며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2년 전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며 명품을 즐기는 ‘된장녀’는 ‘분수도 모르는 여성’이라고 욕을 먹었지만 지금의 신상족은 ‘현명한 소비자’라며 호의적인 반응이 많다. 패션 컨설팅회사 ‘브레인파이’ 피현정 대표는 “명품 위주의 쇼핑을 한다는 점에서 이미지만 다를 뿐 본질은 똑같다”고 말했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소비자아동학)는 “지금은 ‘개성’을 뛰어넘어 ‘소비적 개성’으로 흐를 만큼 소비 수준이 높아졌다”며 “신상족 스타나 아이콘도 스스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신상족이 된 우리들에게 선택되어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