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리터/빌 헤이스 지음·박중서 옮김/440쪽·1만8000원·사이언스북스
피는 상처와 고통을 통해서만 인체 겉으로 드러난다. 피에 대한 두려움은 여기서 생겼을 것이다. 고대인들에게 피는 두려움인 동시에 경외감의 대상이었다.
고대 의사들은 인체에 힘을 불어넣는 생기의 영이 혈액 안에 들어 있다고 믿었다.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기원전 70∼기원전 19)는 자주색(푸른색)으로 보이는 정맥이 정작 흘러나오면 붉은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혈액 속에 “자주색 영혼”이 머문다고 생각했다.
이 책은 이처럼 고대부터 지금까지 피에 대한 인류의 인식과 문화를 다뤘다. 그러나 단지 역사책은 아니다. 이 책의 독특함은 피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 경험이 피를 둘러싼 인류 역사에 대한 조망으로 자연스레 이어진다는 데 있다.
저자의 경험은 동성 연인인 스티브와 관련된 것이다. 스티브는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 바이러스(HIV) 보균자로 10여 년을 살아 왔다. 피가 스티브를 병자로 만든 데서 저자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괴물 세 자매 고르곤을 떠올린다. 고르곤의 몸통 왼쪽에서 뽑아낸 피는 산 사람을 죽이고 오른쪽에서 뽑아낸 피는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힘을 지녔다.
스티브를 병들게 한 피에서 스티브를 살릴 힘을 찾기 위해 노력한 시간 속에서 프리랜서 작가인 저자는 피의 역사에 천착하게 됐을 것이다.
저자는 스티브가 진찰받을 때 피를 뽑는 모습에서 고대 사혈법을 떠올린다. 옛 사람들은 피를 뽑아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고대인들은 인체가 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의 4가지 체액이 균형을 이뤄야 건강하다고 믿었다. 고대 그리스 의사 갈레노스(129∼200)는 고열로 온몸이 붉어진 환자의 피를 뽑았다. 체액이 과다해 병에 걸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반대로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환자는 음식을 많이 먹어야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현대 의학의 시각으로 보면 터무니없는 이런 생각을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도 했다. 그는 임신한 여성의 생리가 중단되는 것은 생리혈이 모유로 변환되기 때문이고 눈물의 원천도 피라고 믿었다.
다시 저자의 경험. 저자는 어느 날 비타민 주사를 자신의 엉덩이에 놓은 뒤 스티브가 썼던 주삿바늘을 썼다고 생각하게 된다. “내 허파를 거쳐 동맥을 통해 곳곳으로 퍼지며 세포를 감염시키고 몸속에 에이즈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장면을 생각하며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다행히 그건 새 주삿바늘이었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혈액이 순환하는 사실을 발견한 영국 의사 윌리엄 하비(1578∼1657) 얘기로 넘어간다. 하비의 발견 이후 유럽 의학계는 혈액 속에 특정 물질을 주입해 이를 확인하려 했다. 아편 포도주 맥주 우유 소변까지 온갖 물질을 피에 주입하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피 속에 초인적인 능력이 있다는 모티브의 만화 이야기를 하다가 현미경을 제작해 피 속의 적혈구를 발견한 네덜란드 박물학자 안톤 판 레이우엔훅(1632∼1723) 이야기를 들려주고, 어린 시절 누이의 생리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다가 여성의 생리를 부정하게 생각한 옛 사람들 이야기를 이어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리 중인 여성이 거울을 보면 핏빛 구름 같은 얼룩이 거울에 남는다고 썼다.
저자의 솔직한 고백에 가슴 찡하다가 기상천외한 피의 역사 이야기에 호기심 가득해진다. 그래서 부제가 ‘피의 역사 혹은 피의 개인사’다. 제목 ‘5리터’는 인체를 흐르는 피의 양을 뜻한다. 원제 ‘Five Quarts’(2005년).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