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6월 23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세종로 중앙청 제1회의실.
박정희 대통령이 TV 카메라 앞에 섰다. 김종필 국무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들은 박 대통령 뒤편에 모두 배석했다. 특별성명을 발표하는 박 대통령의 목소리는 엄숙하면서도 단호했다.
“친애하는 5000만 동포 여러분! 나는 오늘 우리가 그동안 추진해 온 남북대화의 경험과 국제정세에 비추어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의 여건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우리의 평화통일외교정책을 내외에 천명하고자 합니다.”
이른바 ‘6·23선언’이다.
정식 명칭은 ‘평화통일 외교정책에 관한 대통령특별성명’으로 모두 7개 항목으로 짜여 있다.
큰 뼈대는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수의 회원국이 원하고 통일에 장애가 안 되면’이라는 전제조건이 붙었지만 북한을 하나의 정치적 실체로 인정한 것이었다. 남한과 북한이 먼저 실천 가능한 문제부터 해결해 평화체제를 만들고 이후에 통일을 추진하자는 것이다.
7개항은 이 외에도 △남북한 상호 내정 불간섭과 침략 금지 △북한의 국제기구 참여에 반대하지 않음 △호혜평등 원칙하에 모든 국가에 문호개방 등의 내용을 담았다.
6·23선언은 당시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의 탈냉전 해빙 무드라는 역사적인 배경과 궤를 같이 한다. 1970년 8월 15일 박 대통령의 ‘평화통일 구상선언’ 발표에 이어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는 북한 조선적십자회에 이산가족 찾기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해 북한이 이를 받아들인다. 또 1972년 7월 4일엔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 등 조국통일의 3대 원칙을 이끌어낸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다.
6·23선언에 대해 북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2개의 조선정책’이라며 비난하고 나섰다. 북한은 역(逆)으로 김일성의 ‘조국통일 5대 강령’을 발표하면서 고려연방공화국 통일방안을 제안했다. 같은 해 8월 28일 북한은 남북대화를 일방적으로 중단해 버린다.
박 대통령은 1년 뒤 6·23선언 1주년 담화를 통해 “북한은 군사적 도발을 비롯한 대한민국에 대한 모든 내정 간섭과 적대적 행동을 즉각 중단하고 지체 없이 남북 간의 불가침 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에 응해 올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의도와 달리 6·23선언 이후에도 남북한의 대립은 격화됐다. 이후 남한은 유신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고 북한은 김일성 유일지도체제를 떠받들어 남북한이 서로 체제 강화에 열중하게 된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