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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길,배낭 속 친구가 되어주는 책 30선]나를 부르는 숲

입력 | 2008-06-24 03:01:00


◇나를 부르는 숲/빌 브라이슨 지음·동아일보사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있을 때는 숲이야말로 무한한, 그리고 온전한 우주였다. 매일매일 경험하는 것이니까. 실제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트레일에서 내려오면, 얼마나 기만을 당했는지 깨닫게 된다. 여기서는, 산과 숲은 단지 배경일 뿐이다. 끔찍한 상업적 세계의 끝도 없이 펼쳐진 현란함만이 존재한다. 제기랄, 흉측하네.”》

배불뚝이 중년 3400㎞ 애팔래치아 도전기

빌 브라이슨은 질투 나는 글쟁이다. 어떤 종류건 글 쓰는 이라면 탄성과 시샘이 무심코 우러난다. 유머 넘치고 내용 풍부하고 쫀득한 글맛까지. 이 책을 추천한 김완준 작가의 표현대로 “인생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 사물과 인간에 대한 남다른 직관력, 상황과 풍경을 생생하게 재현해내는 뛰어난 문장력을 지닌 현존하는 최고의 여행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나를 부르는 숲’은 그런 저자의 매력이 활짝 피어오른 대표작. 미국인이지만 수십 년간 영국에 머물렀던 저자가 귀향해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에 나선 여행기다. 여기서 ‘트레일(trail)’은 사전에선 길이란 뜻이지만 산길처럼 포장되지 않은 길을 도보로 이동하는 걸 말한다. 조지아 주에서 메인 주까지 무려 3400km가량의 거리. 중년에 등산초보, 배까지 나온 아저씨가 ‘겁도 없이’ 도전을 감행한다.

어떤 배낭을 메야 할지도 모르는 저자가 이런 험난한 길에 나선 이유는 뭘까. “게을러 터졌던 수년간의 생활을 바로잡을 기회다. 20년간 외국에서 생활하다 돌아왔으니 조국의 장관에 몰입하는 건 명분도 있지 않은가. 잘 깎은 화강암과 같은 눈매로 지평선을 응시하며 걸걸한 목소리로 ‘그래, 숲 속에서 단숨에 해치웠지’라고 일갈할 뭔가도 필요했다. … (무엇보다) 풍성한 수종을 자랑하는 위대한 숲은, 지금 위기에 빠져 있다. 이미 나무들은 놀라운 속도로 죽어간다. 애팔래치아 산맥의 아름다움을 경험하려면 지금이 적기다.”

하지만 트레일은 시작부터 엉망이었다. 저자도 저자지만 동행한 친구 카츠가 더 문제였다. 고등학교 친구지만 25년 넘게 데면데면했던 사이. 게다가 한때 알코올중독이었고, 덩치는 늘어진 곰이다. 아니나 다를까, 카츠는 종주 첫날부터 무겁다며 필수용품은 물론이고 먹을 것까지 숲에다 내던져버리는 용감무쌍함(?)을 보여줬다.

스포일러 짓을 하자면, 이 두 양반 끝까지 완주하진 못한다. 하지만 며칠 못 갈 것 같던 첫 예상과 달리, 장장 1392km나 되는 엄청난 거리를 걸어갔다. 물론 중간에 히치하이킹도 하고 마을에서 며칠씩 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요즘 산을 쳐다볼 때마다 나는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도려낸 화강암 같은 눈을 가늘게 뜨며 천천히 음미하면서 바라본다. 우린 다 걷지 못한 게 사실이지만, 여기에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게 있다. 우린 시도했다. 카츠의 말이 옳았다. 누가 뭐래도 나는 개의치 않는다. 우린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걸었다.”

저자의 매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여행기 곳곳에 저자는 미국 자연보호정책의 맹점이나 관광산업에서 드러난 허울을 야무지게 꼬집는다. 그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이는 저자의 멋들어진 장기로 ‘읽어보지 않았으면 말을 마세요’란 얘기가 절로 나온다. ‘발칙한 유럽 산책’(21세기북스) ‘빌 브라이슨의 재밌는 세상’(추수밭) ‘거의 모든 것의 역사’(까치) 등 그의 다른 책들도 놓치면 아쉽다. 원제 ‘A Walk in the Woods’.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