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 트랍 대령이 누구인지는 많은 사람이 알 것이다.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실제 주인공인 그는 1938년 나치의 오스트리아 병합에 반대해 가족을 이끌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영화에는 그가 공연에서 ‘에델바이스’를 불러 오스트리아인의 애국심을 자극하자 청중 대부분이 따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이는 당시의 분위기에 비춰 볼 때 있을 법하지 않은 장면이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무력 병합한 뒤 실시한 주민투표에서 99.73%가 병합에 찬성했다.
기자가 우리 사회의 특정 세력을 나치에 비유했다고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위에 언급한 사실은 ‘분노’와 ‘열정’이 대중의 올바른 선택을 가로막을 수 있음을 증명하는 고전적인 사례일 뿐이다. 오스트리아인들은 대제국이었던 모국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한낱 소국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에, 또한 테러의 만연과 혼란에 분노했다. ‘우리는 대(大)독일인이다’라는 민족주의적 열정은 나치의 독(毒)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했다.
민족애는 분명 인간의 열정을 끌어내는 데 적합한 도구 중 하나다. 최근 우리 사회를 휩쓴 열정도 그렇다. 우지(牛脂)라면 파동이나 만두파동에서 경험했듯 누구에게나 민감한 식품안전문제에 ‘미국에 빌붙어서…’라는 민족주의적 열정이 결합했으니 그 폭발력은 이해할 만하다.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자서전 ‘어제의 세계’에서 제1차 세계대전 직전 프랑스의 소도시 영화관에서 접한 두려운 현실을 회상한다. 뉴스필름에 독일 황제가 등장하자 순박한 시골 농부들과 소상인들은 일제히 일어나 욕설을 퍼부었다. 그것은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츠바이크가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린 장면이기도 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다수’에 기대어 분노와 열정을 표출한다. 시위 저지용 컨테이너가 등장하자 “시민과 벽을 쌓겠다는 거냐”며 목소리를 높이더니, 컨테이너가 사라지자 기다렸다는 듯이 경찰 버스를 두들겨 부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언론사 건물을 딱지로 장식하고 사기(社旗)까지 끌어내리는 그들의 모습은 제법 용맹스러워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용기일까. 기자는 ‘다수의 열정에 함께 도취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오만에 저항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용기’라고 배웠다. 앞서 언급한 츠바이크는 1차 대전이 막을 내린 뒤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 등과 손잡고 국가 간의 연대와 이해를 호소하는 평화주의 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독일에서 파시스트가 집권하자 그들의 목소리는 묻혀버렸고 츠바이크는 고국을 떠나 떠돌아다녀야 했다. 그들의 용기가 올바르게 평가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하나의 유럽’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나오면서부터였다.
모두가 고열에 들떠 있을 때 이성의 목소리는 외면받기 일쑤다. 그 조용하지만 당당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충돌과 소란의 파열음을 힘들게 감당하고 있는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나 들뜬 열정이 가라앉고 나서야 한 시대가 마주했던 우행(愚行)이 드러날 것이다.
한때 ‘다수’에 도취해 자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 깨닫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도 때가 되면 그 값을 내게 될 것이다. 많은 것을 낼 필요는 없다. 단지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싶다. 1980년대 구소련과 동구권의 ‘인간성이 실현된 사회’를 예찬했다가 훗날 그때에 대해 말 꺼내기를 주저하게 된 많은 사람들처럼.
유윤종 국제부 차장 gustav@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