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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66년 김기수 한국복싱 첫 세계챔프

입력 | 2008-06-25 02:58:00


초여름 저녁. 거리는 적막했다.

TV 수상기가 몇 집 걸러 한 집 있던 시절. TV 앞에 전 국민이 모여 앉았다.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TV 앞에서 여름 날씨보다 더 뜨거운 열기를 뿜어낸 지 한 시간여. 10여 초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터져 나온 환호성이 일시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광복 후 처음으로 대한민국 선수가 스포츠에서 세계 정상에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1966년 6월 25일 김기수는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2-1 판정승으로 누르고 WBA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 벨트를 차지했다.

“내가 챔피언이 된 이유는 잘 맞았기 때문이다.”

당시 경기의 작전에 대해 그는 은퇴 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오른손잡이인 그는 당시 왼손잡이 자세로 경기를 치렀다.

“그가 내 주먹 중에 어떤 것을 맞을 것인가를 고민할 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난 왼손잡이처럼 폼을 잡았지. 그래야 내 오른 주먹을 맞아줄 거니까.”

그가 밝힌 이유다.

챔피언으로서의 그의 인기는 대단했다.

영화 ‘록키’의 인기에 비할 수는 없지만 챔피언이 된 지 2개월 후 그가 주연을 한 영화가 상영될 정도였다. 김기덕 감독이 만든 ‘내 주먹을 사라’는 제목의 이 영화에는 박노식 김지미도 출연했다.

‘3전 4기’의 홍수환 전 세계챔피언도 그가 챔피언에 오른 뒤 벌인 카퍼레이드를 보고 권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1968년 5월 25일 3차 방어전에서 이탈리아의 산드로 마징기에게 1-2로 판정패해 챔피언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은퇴 후 “당시 대전료로 5만5000달러를 받아, 나라에 진 빚을 갚았으니 속이 후련하다”고 말하곤 했다.

23개월 전 챔피언에 오른 경기의 대전료를 정부가 지불한 것을 언급한 것이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200달러를 막 넘어섰던 1966년 벤베누티는 대전료로 5만5000달러를 요구했다.

대전료로 고민하던 그를 박정희 대통령이 불렀다. “이길 자신 있어요?”라는 대통령의 질문에 그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하겠습니다”고 답했다. 대통령은 어디론가 전화를 했고 대전료는 정부에서 지불했다.

박 대통령은 1965년 포항제철 건설을 맡고 있던 박태준 전 총리에게 이미 그의 뒤를 봐주라는 지시를 했다.

박 대통령은 박 전 총리에게 “김기수란 친구가 있어. 물건이야. 우리 국민의 사기 진작을 위해 세계챔피언도 나와야지. 다른 나라를 이겨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해”라며 후원해주라고 지시했다.

그의 챔피언 등극 후 한국은 챔피언 44명을 배출하며 한동안 프로복싱 강국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지난해 7월 마지막 세계챔피언 지인진이 “복싱계가 너무 열악하다”며 챔피언 벨트를 반납하고 격투기로 옮겨가 무관으로 떨어졌다.

이현두 기자 ruch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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