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폭격기를 향한 북한군의 지상 대포 소리가 울리고 나면 파편 덩어리가 우수수 떨어진다. 그 쇳조각이 오늘은 바로 발 앞에 탁 떨어졌다. 머리에 맞았으면 어땠을까. 파편이 휩쓸고 간 뒤 널린 시체를 보면 죽고 사는 게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1950년 7월 4일)
열세 살 소년의 눈에 비친 ‘함락된 서울’의 일상이다.
성신여대 이현희(71·사진) 명예교수는 1950년 6월 25일부터 그해 9월 28일까지 겪었던 90일간의 체험을 빠짐없이 적었다. 당시 이 교수는 나치를 피해 다락방에서 일기를 썼던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와 동갑이었다.
2006년 그는 먼지가 쌓여가던 58년 전 전쟁일기를 다시 꺼냈다. 중고교생 절반이 6·25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 모른다는 기사를 봤기 때문이었다. 세월에 희미해진 글씨를 기억으로 되살리는 데 2년이 걸렸다. 그의 일기는 ‘내가 겪은 6·25전쟁 하 서울 90일’이라는 제목으로 25일 출간됐다.
전쟁 당시 이 교수의 가족은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살았다. “북괴군을 격퇴했으니 동요하지 말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방송을 믿었다가 피란 시기를 놓쳤다.
두 형은 북한군 의용군으로 끌려갈까봐 다락방에 숨어 지냈고 누이들도 폭격 위험에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식량을 북한군에게 모조리 공출당해 이 교수는 45km 떨어진 경기 파주 큰집까지 하루 종일 걸어가 보리를 얻어오곤 했다.
전쟁의 광기는 어린 그에게도 덮쳤다. 이화여대 의대에 다니던 큰누나는 학교 앞에서 폭격에 맞아 숨졌고 소아마비를 앓던 막내 동생은 굶어 죽었다.
“집 앞 방공호에 가니 천진난만한 풀빛 얼굴을 한 내 또래 소년병이 배에서 피를 쏟고 있었다. 평양에서 1주일간 총 쏘는 훈련만 받고 내려왔다고 했다. 혁대를 풀어 지혈을 한 뒤 구급약을 가지고 나왔을 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마니’가 보고 싶다는 게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1950년 8월 25일)
“그날 흘린 눈물이 평생 마음속 숙제로 남았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50년 넘게 한국 현대사를 연구하는 고희의 학자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으로 그는 아직도 숙제 중이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