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난 송아지의 눈’으로 활을 쏴라
《바람이 거세어지기 시작한다며 해설자는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두고 흥분하고 있었다 총알이 뚫어야 하는 것은 공기의 저항이며 총구는 과녁을 약간 빗겨나가 조준하여야 한다는 것 사수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표적이 아니라 표적이 놓여있는 주변의 움직임이라는 것 오차범위를 계산한 오조준만이 정확히 과녁을 관통할 수 있다는 것 결국은 정조준이라는 것 일발필살의 단발이 당신의 배후를 노리고 있다 목표물을 향하여 고정되어 있는 당신의 시선은 그러므로 수정되어야 한다 지금 바람이 불고 있다― 이정화의 ‘오조준’》
활은 심장이다. 화살은 심장에서 내뿜는 피다. 심장은 머물러 있지만 평생 작동한다. 피는 쏜살처럼 흘러가지만 금세 힘이 떨어져 헌 피가 된다. 활은 부모다. 화살은 자식이다. 화살은 활시위를 떠나기 전까지만 활 품 안에 있다. 활은 때가 되면 시위를 힘껏 당겨 화살을 멀리 떠나보낸다. 시위 떠난 화살은 혼자다. 어느 쪽으로 가든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한다.
▼영상 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김미옥 기자
활쏘기는 기본적으로 무산소 근육운동이다. 하지만 유산소운동 효과까지 낸다. 활은 머물러 있지만 화살은 달려간다. 정중동(靜中動)의 전신근육운동을 한다.
국궁(國弓)은 우리의 전통 활이다. 길이가 120∼130cm 밖에 되지 않는 짧은 활(단궁·短弓)이다. 생김새가 단순하고 소박하다. 굽은 데가 울퉁불퉁 5군데나 된다. 물소 뿔, 소 힘줄, 나무 등을 붙여 만들어 ‘뿔활(각궁·角弓)’이라고도 한다. 그만큼 탄력이 뛰어나다. 가지고 다니기 쉽고 쏘는 데 힘도 많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만들려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최대사거리 145m.
고구려 무사들은 바로 이 활로 만주 벌판을 누볐다. 칭기즈칸의 몽골 기마병도 이와 비슷한 활로 유럽을 평정했다. 몽골은 고려를 정벌한 뒤 맨 먼저 고려의 활 만드는 장인들부터 모조리 잡아갔다.
일본 장궁(長弓)은 220∼230cm의 대나무 활이다. 사거리 30∼50m. 영국이나 동남아시아 활도 비슷하다.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어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 재료도 한 가지만 쓰기 때문에 비용도 적게 든다. 하지만 가지고 다니기에 불편하다.
○ TV사극, 활은 국궁인데 쏘는 자세는 양궁식
이장재(73) 대한국궁문화협회 고문은 경력 20년의 국궁 마니아다. 요즘도 하루 두 번씩 서울 정릉에 있는 활터 백운정을 찾는다. 화살은 오전 오후 각각 45발씩(9순) 쏜다. 명중률은 50∼70%. 한창 때 럭비 테니스 등 안 해본 운동이 없지만 결국 활쏘기에 빠졌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될뿐더러 뼈나 근육에 무리가 없어 좋다.
“우리 전통 활이 5군데가 구부러져 있듯이 활쏘기도 5곳(머리, 가슴, 하체, 내장, 마음)을 튼튼하게 해준다. 게다가 활을 쏘려면 늘 먼 곳을 봐야 하기 때문에 눈이 저절로 좋아진다. 나도 돋보기를 안 쓴다. 요즘엔 젊은 사람들이 점점 국궁에 관심을 두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TV사극을 보면 분통이 터진다. 활은 우리 국궁인데 활 쏘는 자세는 양궁식이거나 국적 불명이다. 게다가 타는 말도 서양말이다. 갓 쓰고 자전거 타는 꼴이다. 국궁과 양궁은 활 구조부터가 다른데 어떻게 쏘는 자세가 같은 수 있겠는가?”
장수남(77) 할머니는 15년째 국궁에 빠진 경우다. 허리가 꼿꼿하고 몸의 균형이 젊은 사람 못지않다. 활쏘기를 하면서부터 단잠을 자고 소화도 잘된다. 명중률은 45발 중 30∼40발 수준.
“활쏘기는 중심 운동이다. 우선 활을 쏠 때는 딴 생각하지 말고 오직 활에만 집중해야 한다. 숨을 깊이 들이쉬면서 엉덩이를 집어넣고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똑바로 서야 한다. 몸과 마음 어느 하나라도 중심이 흐트러지면 화살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간다. 활쏘기를 마치고 나면 몸과 마음이 정갈해지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김경애(68) 할머니는 7년 경력. 활쏘기를 하면서부터 폐활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눈이 맑아진 것은 기본이다. 감기 몸살 등 잔병치레가 눈 녹듯이 사라졌다. 다리에 힘이 붙어 먼 거리를 걷는데도 숨이 차지 않는다. 9년 경력의 이순자(56) 씨는 처음 2∼3개월 연습 만에 살을 5kg이나 뺐다.
연익모(51) 대한국궁문화협회 총재는 말한다.
“우리 국궁은 부탄 왕국의 활과 더불어 세계 으뜸으로 인정받는다. 활쏘기를 할 때는 저절로 복식호흡이 되기 때문에 하단전이 단단해지고 항문이 조여진다. 석 달 정도만 하면 노인들은 요실금이 사라지고 뱃살까지 빠진다. 일에 찌든 도시인들은 한순간에 스트레스를 날릴 수 있다. 국궁은 바르게 쏴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현재 문화재청에서 국궁활쏘기법의 무형문화재 지정을 심의하고 있는데, 이것이 확정되면 일반인들도 영상으로 쉽게 익힐 수 있을 것이다.”
○ 정조, 열두 번이나 50발 중 49발 맞혀
활쏘기 격언은 한번 들으면 귀에 쏙 들어온다. ‘앞발은 계란을 밟듯이, 뒷발은 살모사나 전갈을 밟듯이 하라’ ‘줌손은 태산을 밀듯 앞으로 버티고, 시위를 당긴 깍짓손은 호랑이 꼬리같이 피라’ ‘모든 활쏘기는 들숨과 날숨의 사이에 있다’ ‘활은 달걀 잡듯이 하고 화살끼움은 저울추 걸듯이 하라’.
국궁 가격은 FRP로 만든 개량궁이 20만∼25만 원. 무소뿔 각궁은 65만 원대. 화살은 카본형이 1개 7000∼8000원. 대나무화살은 1개 2만5000원.
국궁 활터는 전국 370여 곳에 있다. 서울은 9곳에 불과하다. 대부분 공원이나 국유지 안에 자리 잡고 있지만 일부에선 그것마저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다. 정릉 백운정 국궁사범 홍준표(69) 씨는 “정릉 밖으로 무조건 나가라고만 하니 답답하다. 갈 데도 없는데 어디로 가라는 것인가? 조선 말기까지만 해도 서울 4대문 안에 활터가 40여 곳이나 있었다. 이젠 겨우 2곳(사직공원 황학정, 남산 석호정) 남았다. 행당동 살곶이정과 목동의 영학정도 우리와 처지가 비슷하다. 국궁은 우리 민족의 얼인데 이런 홀대가 어디 있느냐”고 말했다.
조선 정조 임금은 활쏘기에 능했다. 50발 중 49발을 맞힌 게 무려 12번이나 될 정도였다. 그것도 마지막 한 발은 일부러 숲 속을 향해 쏘거나 과녁을 비켜 쏘았다. 신하들이 의아해하면 정조는 조용히 말했다.
“활쏘기는 군자의 경쟁이다. 군자는 남보다 더 앞서려 하지 않는다. 사물을 모두 차지하는 것도 필요한 게 아니다. 완벽한 경지에 오르면 다음은 그보다 못한 것일 수밖에 없다.”
화살은 과녁을 향해 날아간다. 과녁은 늘 그곳에 있다. 아니다. 과녁은 움직인다. 바람이 불면 화살도 움직인다. 마음이 흔들리면 화살도 과녁도 모두 흔들린다. 촛불이 흔들리면 바람이 흔든 것인가, 아니면 촛불 스스로 움직인 것인가.
명사수의 과녁은 촛불도 바람도 아니다. 자기 자신이 곧 과녁이다. 자신의 과녁을 향해 쏜다.
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 mars@donga.com
▼영상 취재 : 동아일보 사진부 김미옥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