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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우 칼럼]‘미친 소’보다 두려운 것은

입력 | 2008-06-27 20:17:00


초반 포석에 실패한 데다가 치명적인 악수(惡手)를 두는 바람에 판이 엉망이 돼버렸다. 천하의 고수(高手) 이창호, 이세돌이라고 해도 수습이 어려울 판이다. 바둑이면 조용히 돌을 거두면 된다. 그러나 국정은 바둑이 아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판을 뒤집으려 하다가는 오히려 헌정(憲政)질서가 붕괴될 수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얼마 전 촛불시위와 관련해 “청와대로의 행진과 정권퇴진 요구는 헌정질서에 맞지 않고 민주주의 질서에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혁명 항쟁을 요구하는가?

물론 국민은 독재와 폭정(暴政)에 저항할 권리를 갖는다. 국회는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면 탄핵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이미 다 경험했다. 1960년의 ‘4·19혁명’은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렸고, 1987년의 ‘6월 시민항쟁’은 전두환 파쇼정권을 굴복시켰다. 2004년 3월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한 야당은 선거법 위반 등을 들어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했다(두 달 후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기각 결정으로 노 대통령은 직무에 복귀했다).

지금 국민이 혁명이나 항쟁을 요구하는가? 대통령 탄핵에 동의하는가? 실망하고 분노했을지언정 그건 아닐 것이다. 반성하고 잘 해보겠다고 하니 시간을 주고 지켜보자는 게 다수의 생각일 것이다. 촛불 민심은 결코 불법 폭력시위를 옹호하지 않는다.

이명박 대통령은 인사에 실패함으로써 초반 포석을 그르쳤다. ‘쇠고기 졸속협상’이란 악수를 둬 국정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국민건강을 내세웠던 촛불집회는 촛불시위로 번졌고 반(反)정부 시위로 변질됐다. 대통령은 두 번 사과하고, 정부는 미국과의 추가협상을 통해 30개월 넘은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을 막고 허술했던 검역주권을 보완했다. 그리고 시간을 끌어봤자 대안(代案)도 없는 데다가 미국과의 통상마찰 등 부작용만 커질 우려가 있다며 ‘쇠고기 고시(告示)’를 강행했다. ‘어려운 결정’을 했으니 국민이 믿고 지켜봐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어려운 결정’은 당장 어려움에 직면했다. 야당은 국회 등원을 거부했고,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선언했으며, 광우병국민대책회의는 정권퇴진 운동도 불사(不辭)하겠다고 한다. 국민의 과반수는 이제 촛불시위는 그만 멈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정부의 쇠고기 추가협상을 전적으로 믿는 건 아니다. 과반수가 동의하지 않는다. 쇠고기 문제는 고시로 해결될 수 없다. 국민에게 설렁탕, 곰탕을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는 믿음을 줄 수 있을 때에야 풀릴 수 있다. 원산지 표시부터 단체 급식에 이르기까지 불신과 불안의 소재들은 널려 있다. 정부가 말로만 믿고 지켜봐달라고 했다가는 국민은 언제든 다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설 것이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대통령과 정부만으로는 미흡하다. 입법부를 구성하는 여야, 그중에서도 제1야당인 민주당의 견제와 협조가 반드시 필요하다. 예컨대 미국산 쇠고기를 한우(韓牛)로 속여 팔지 못하도록 원산지 표시제를 강화하려 해도 식품위생법 등 관련법을 개정해야 한다. 민주당은 광우병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서는 현재의 가축전염병예방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정된 국내법이 국제협정에 소급 적용될 수 있느냐는 문제를 떠나 법을 개정하려면 여야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

민주당은 당장 국회로 들어가야 한다. 아무 것도 얻은 것 없이 빈손으로 어떻게 들어가느냐, 거대 여당과의 기 싸움에서 밀리면 18대 국회 내내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는 등의 진부한 소리는 그만해야 한다. 싸우더라도 국회에 들어가 싸워야 한다. 국회의원이 싸울 곳은 길거리가 아닌 국회다. 등원 명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국민의 75%가 등원하라는데 그만한 명분이 어디 있겠는가. 쇠고기 정국에서 한나라당 지지율이 급락했는데도 민주당 지지율은 그 반 토막 언저리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일주일 후 누가 민주당의 당 대표가 되고, 누구누구가 최고위원이 되는지 대다수 국민은 관심조차 없다. 장외투쟁을 고집할 때가 아니다.

‘축제 뒤의 재앙’

거리의 정치가 의회 정치를 대체할 수도 없고, 대체해서도 안 된다. 참여민주주의가 대의(代議)민주주의를 보완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제한적이고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 거리의 직접민주주의가 익명(匿名)의 디지털 포퓰리즘과 결합하면 축제 뒤 재앙이 될 수 있다. 이는 특정 정권의 성패(成敗)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미친 소’보다 두려운 일이다.

전진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