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은 오늘날 모든 국가구성원을 뜻하는 말이 되었지만 원래는 차별의 의미를 지닌 말이다. 고대 로마에는 시민권을 지닌 사람들이 따로 있었다. 로마 시민들은 참정권과 일부 세금을 면제받는 권리를 누렸다. 그래서 로마가 점령한 지역의 사람들은 누구나 로마 시민이 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특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의무가 더 강조됐다. 로마 시민이 가장 명예롭게 생각했던 일은 스스로 나라를 지키는 일이었다. 시민권자들로 구성된 로마군대는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로마제국이 몰락한 원인으로 212년 안토니우스 칙령을 꼽는 학자들이 있다. 이 칙령은 로마제국에 속해 있는 모든 속주 사람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세금을 더 걷기 위한 이 조치는 로마를 지켜온 시민정신의 쇠퇴를 가져왔다. 과거 속주 사람들은 시민권을 얻기 위해 로마를 위해 열심히 싸웠으나 그 동기를 잃어버렸다. 기존 로마 시민도 애써 시민의 의무를 다할 의욕을 잃었다. 국가 구성원들 사이에 내 나라 내 가족을 지키겠다는 책임의식이 사라지면 국가의 생존은 기약할 수 없다.
▷촛불시위를 둘러싸고 ‘시민’이란 말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시위를 주도하는 쪽이 주로 시민을 강조한다. 시위에 참여하는 단체들은 ‘시민단체’로 부르고 반대하는 단체는 ‘보수단체’로 지칭하는 식이다. 일부 언론도 ‘경찰이 시민을 과잉진압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객관적인 표현이 아닐 뿐 아니라 폭력을 정당화할 우려마저 있다. 물론 정권 퇴진을 외치는 시민이 있을 수 있고, 촛불시위에 반대하는 시민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이 어린 전경들에게 쇠파이프를 휘두르고 타인(他人)의 생존권을 멋대로 침해하는 사람들까지 ‘시민’이라고 불러도 좋은 것일까.
▷권위주의 정권을 거쳤던 한국에서 ‘시민’은 저항의 주체로 인식돼 있다. 그래서 현 시국을 ‘국가와 시민사회’의 대결이라고 말한 인사도 있다. 하지만 사회질서를 걱정하고 공동체의 안녕을 우려하는 시민의 의무도 생각해야 할 때다. 우리의 미래는 스스로 지켜야지 남이 지켜주지 않는다. 어느 쪽이 진정 나라를 걱정하는 ‘시민’인지 판가름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