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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김서령]‘기적 ’확인하러 만리포 가요

입력 | 2008-07-01 02:58:00


만리포 앞바다가 살아났다. 고둥이 모래밭에 둥글게 구멍을 파고 물풀이 물결 따라 말갛게 나부낀다. 드디어 6월 27일 만리포는 해수욕장을 개장했다.

지난겨울 바다 전체에 시커먼 기름띠가 뒤덮였던 때로부터 딱 204일 만이다. 손으로 파보는 모래밭엔 새살이 돋듯 맑은 물이 고여 온다. 새끼 게들이 옆걸음으로 기어 재빨리 뻘 밭 속에 숨는다. 자그만 바지락이 뽀글뽀글 모래를 토해 놓는다. 아, 눈물겹게도 사랑스러운 생명들!

재앙 이겨낸 뻘밭의 작은 생명들

지난겨울 바람 많이 부는 날 나도 이 갯바위 어느 지점에 엎드려 있었다. 암만 닦아도 기름은 지워지지 않았다. 어림없다고 생각했다. 모래밭을 슬쩍만 건드려도 다시 기름이 솟아났다. 분노하고 경악했고 무엇보다 두려웠다. 걸레로 쓸 헌 와이셔츠는 악에 받쳐서 그런지 손만 갖다 대면 좍좍 잘도 찢어졌다. 돌아오면서 우리들은 태안군 소원면 어딘가의 허름한 굴밥 집에서 몸을 녹였다. 충혈된 서로의 눈을 외면하며 재벌기업과 검찰의 의심스러운 유착관계를 난폭하게 공격했었는데!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바다에 작은 생명들이 꼬물대기 시작했다. 감격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모래밭에서, 물 바닥에서 움직이는 조그만 생명을 발견해 내는 일보다 더 큰 감격은 없다. 새삼 느끼는 일이지만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들은 결코 보잘것없지 않다. 그걸 우린 재앙을 겪은 후에야 깨달았다. 검은 기름을 두른 물새 떼들이 바닷가에 픽픽 쓰러지는 것을 보고 난 후에야 흰 모래, 푸른 파도가 절실하고 엄숙한 축복이었다는 것을 절감했다.

지난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태안에 내려간 자원봉사자는 총 120만 명에 이른다. 그들은 바다를 오염시킨 장본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한 이 땅의 민초들은 제 입던 무명옷을 찢어 바윗돌과 모래를 문지르면서 스스로의 오만과 무지를 반성했다.

재벌이, 정치인이, 사법 권력이, 종교가 하지 못한 일을 이름 없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뤄 냈다. 아마도 그들의 정성이 우주 안에 가득 찬 어떤 절대적 존재를 감응시켰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도저히 이뤄질 수 없는 일이 생기는 것이 기적이라면 태안의 푸른 파도는 이미 기적이다. 우주 안의 절대적 존재란 신비하고 주술적인 무엇이 아니라 바로 자연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자연엔 엄청난 치유력이 있다. 그 힘은 1만 t의 기름띠를 6개월 만에 능히 없앨 수 있을 만큼 강력하다. 단, 거기 사람의 힘 혹은 정성이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은 막강한 힘을 갖되 살짝 인색하기도 해서 저 홀로 그렇게 작동해 주지는 않는다. 진인사(盡人事)해야 대천명(待天命)할 수 있다는 것은 예민한 이들이 발견해 낸 진리다.

그러나 서해안 모든 바다가 만리포 같지는 않다. 아직 구름포 십리포 백리포는 해수욕장으로 개장하지 못했다. 좀 더 꼼꼼한 점검을 거친 후가 아니면 문을 열 수 없단다. 재작년 강원도가 큰 수해를 만났을 때 나는 이 칼럼에다 강원도로 휴가 가서 감자를 한 솥씩 삶아 먹고 오자고 썼다.

올여름 한 번쯤 서해안으로 가자

올해 휴가는? 그렇다. 서해다! 태안이다! 만리포다! 아픈 이웃에게 팥죽을 한 솥 쒀서 이고 가던 인정은 우리 뼈에 대대로 아로새겨진 기질이다. 굴 밭과 김 밭을 잃어버린 내 이웃들, 아직 제대로 보상조차 못 받았다는 그들에게 가자. 가서, 기사회생한 만리포 앞바다를 서늘하게 바라보자. 지난겨울 기름을 닦아 낸 사람들은 올여름 제가 살려 낸 바다에 뛰어들 자격이 충분하다. 이번에 살려 낼 것은 태안의 경제다. 우리 각자는 힘만 합하면, 정성만 들이면, 못할 게 아무것도 없는, 자연 그 자체가 아니더냐!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