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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패션]앙증맞은 화장품 용기, 예술품 뺨치네

입력 | 2008-07-04 02:58:00


《화장품 통을 ‘쓰고 나서 버리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당신은 구세대다. 물건을 기능 위주로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내용물이 남아있지 않아도 액세서리로 목에 걸거나 갖고 다닌다면 당신은 신세대 소비자다. 기능이 아닌 디자인을 소비하는 층이다. 화장품 용기가 진화하고 있다. 단순히 화장품을 담는 그릇에서 정보기술(IT) 기기로, 예술작품으로, 또 목걸이로 바뀌고 있다. 심지어 화장품이 아닌 용기를 소비하기 위해 구매하는 사람들이 생길 정도다. 화장품 회사들은 컬렉터를 겨냥해 예술가, 디자이너와 손잡고 제품을 생산하기도 한다. 건축가 루이스 설리반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고 디자인 철학을 설파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화장품 용기의 진화에는 기능상의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왜, 어떻게 변신하는지 디자인을 입은 화장품의 세계로 안내한다.》

액세서리-IT결합 제품 쏟아져

● 아티스트, 화장품과 만나다

고급 화장품이냐 아니냐를 구분 짓는 잣대가 화장품 용기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알고 보면 이 정의는 전혀 우습지 않다. 실제로 고급 화장품 회사들은 용기에 자신만의 기술과 의도를 담는다.

예를 들어 밤에 쓰는 나이트크림은 뚜껑을 내려놓을 때 유리가 부딪히는 ‘쨍그랑’ 소리가 아닌 둔탁한 소리가 나도록 디자인한다. 립스틱도 들었을 때의 무게감을 고려해 양을 정하고 열었을 때 경쾌한 기분이 들도록 뚜껑이 ‘뿅’ 하고 열리도록 만든다. 화장품은 바르는 즐거움만 아니라 듣고 보고 만지는 즐거움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은 ‘보는 즐거움’이 중시되는 추세다.

랑콤이 이달 중 내놓을 립스틱과 아이섀도 복합제품인 ‘로터스 스플렌더’는 금박을 입힌 타조 알처럼 생겼다. 그런데 여는 순간 연꽃으로 변신한다. 프랑스의 유명 디자이너인 알렉시스 마빌이 디자인한 것으로 인도의 미의 여신인 ‘라크시마’를 상징하는 연꽃을 모티브로 만들었다. 마빌만이 아니다. 랑콤은 최근 한국에서 명품 가방으로 유명해진 고야드와 합작해 고객 이름을 새긴 화장품 가방을 만들고 영국의 신진 디자이너 크리스토퍼 케인이 그린 일러스트레이션을 립글로스에 새기느라 바쁘다.

색조화장 전문브랜드인 맥은 미국 뉴욕의 언더클럽문화를 대표하는 패션브랜드 헤더렛과 손잡고 분홍색의 헤더렛 컬렉션을 이달 중 판다. 헤더렛은 힐튼가의 상속녀 패리스 힐튼, 그웬 스테파니 등이 즐겨 입는 패션브랜드로 대표 디자이너인 리치리치와 트레버 레인즈가 ‘클럽키드’들이다.

기존 맥 제품은 까만색 용기로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즐겨 사용하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이 제품은 분홍색으로 유치한 느낌이 들 정도로 화려하다. 미국에서 올해 초에 선보였을 때부터 한국 소비자들이 인터넷 경매를 통해 살 정도로 인기였다. 맥은 “워낙 전문가용 제품이라는 이미지가 강해 일반인들이 손쉽게 접근하면서도 컬렉션하고 싶어 하는 시즌 한정 제품을 내고 있다”며 “디자이너의 감성을 담은 화장품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슈에무라의 ‘루즈 언리미티드’는 유명 일본 건축가 캘빈 차오가 디자인한 제품이다.

예술가의 작품이 고스란히 제품에 반영되는 경우도 있다.

국산 색조화장 전문브랜드 클리오는 박윤경, 박향숙, 김부자, 김일화 등 독특한 화풍을 지닌 작가들의 작품을 아이섀도와 블러셔에 담았다. 여성들이 화장을 한다는 건 예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게 화가들의 작품을 담은 이유다.

설화수 ‘진설’은 채화칠기 명인이자 무형문화재인 김환경 선생이 직접 제작한 채화칠기함에 화장품과 빗과 거울을 담기도 했다. 지난해 말 100개 한정으로 110만 원에 팔았는데 칠기함의 가치 덕분에 고가에도 불구하고 내놓자마자 동이 났다.

후 ‘환유고 크림’은 국보 제287호인 백제 금동대향로의 봉황의 모습을 금속공예로 만들어 용기에 달았다.

● 때론 액세서리로

크리스티앙 디오르는 항상 패션디자이너의 감성과 디자인 정신을 담아 패션쇼 장에 걸치고 나가도 어색하지 않을 화장품을 만들어 내놓는다. 올 시즌에는 패션 쪽 대표 디자이너인 존 갈리아노가 오트쿠튀르 컬렉션에서 선보인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아 ‘젬 골든 디오르’를 선보였다. 이 제품은 화려한 금장식으로 로고가 큼지막하게 새겨진 펜던트처럼 생겼다. 입술, 볼, 눈까지 커버할 수 있는 멀티형 제품이다. 디오르는 “통상 화장품은 아트 디렉터가 제작하지만 시즌 한정으로 내놓는 제품들은 패션 쪽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며 “패션에서 시작해 화장품까지 제작하는 브랜드의 특성”이라고 설명했다.

겔랑에는 보석디자이너가 직접 디자인한 화장품도 있다. 파뤼르 콤팩트 파운데이션은 프랑스 디자인학교인 ‘에콜 데 보자르 드 파리’를 졸업한 헤르베 반데르 스트라텐이 디자인한 용기에 콤팩트를 담았다. 휴대전화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 사용하기 편리하면서도 순금으로 고급스럽게 장식했다. 드비어스 등 보석 브랜드에서 작업했던 또 다른 보석디자이너 헬린 쿠테뉴 들라랑드는 크림 등 다른 용기를 만든다. 부르주아는 휴대전화 액세서리 모양의 깜찍한 립글로스로 인기를 얻은 뒤 최근 마스카라도 내놨다.

● 화장품이야, IT 제품이야?

얼마 전 이노디자인은 MP3 플레이어를 화장품 팩트 모양으로 만들어 내놓았다. 거꾸로 화장품 회사들도 IT기기를 모방한 제품을 내놓는다. 라네즈의 슬라이딩 팩트는 열었을 때 얼굴 쪽으로 살짝 꺾어지는 모토로라의 휴대전화 신제품 ‘Z8m’을 닮았다.

모양이 아닌 기능에서 IT를 차용한 제품도 많다.

헤라의 ‘더마 라인’은 화장품과 함께 IT기기가 들어 있다. 피부과에 가서 초음파 시술을 받는 여성들이 늘면서 집에서도 시술받는 느낌을 주기 위한 것이다. 단순히 화장품을 바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이온, 초음파기계로 화장품을 피부 깊숙이 전달하게 된다.

SKⅡ의 ‘에어터치 파운데이션’은 제품 모양도 MP3(옙 S2) 플레이어와 비슷하고 기능도 IT가 접목돼 있다. 배터리가 달린 이 IT 화장품은 피부에서 10cm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스프레이 버튼을 누르면 눈썹, 머리카락에 묻지 않고 얼굴 피부에만 도포되는 파운데이션이다.

DHC는 화장품 회사이지만 ‘페티코 스타터’라는 IT기기를 별도로 내놓았다. 피부에 전류를 흐르게 해 미용액의 피부 흡수를 도와준다.

주주에이비씨의 속눈썹 고데기 ‘쎌컬’은 별도 배터리 없이 휴대전화에 끼워 사용한다.

삼성디자인학교(SADI) 제품디자인학과 박영춘 교수는 “첨단 IT 시대에 디자인이 IT를 반영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며 “개성이 중시되는 시대의 욕구와 맞물려 업종 간 영역을 허문 디자인의 제품들은 앞으로 더 큰 인기를 끌 것”이라고 말했다.

하임숙 기자 arteme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