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원리를 우리 주위의 일들과 연관지어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은 과학을 재미있게 공부하는 좋은 길이다.
피아노에는 88개의 키가 있다. 88올림픽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숫자이다. 피아니스트는 88개의 키가 내는 음들의 화합(和合)을 통해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낸다. 그중에는 다른 키보다 훨씬 자주 쓰이는 것도 있고, 아주 드물게 쓰이는 것도 있다.
자연에는 피아노 키와 비슷한 수의 화학원소가 있다. 북핵 문제 덕분에 가끔 접하는 우라늄은 92번째 원소로 자연에서 가장 무거운 원소이다. 피아노에서 제일 높은 음을 내는 키인 셈이다. 자연도 약 90가지 원소 중에서 20가지 정도의 원소를 주로 사용해서 삼라만상을 만들어낸다. 생명체에서는 수소 산소 탄소가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된다. 도, 미, 솔인 셈이다. 그 다음으로는 파, 라처럼 질소와 인이 필수적이다. 우리 몸에는 그 밖에도 칼슘 칼륨 황 나트륨 염소 마그네슘이 꽤 들어 있고, 열 가지 정도의 미네랄 성분이 미량 들어 있다.
피아노에서는 도, 미, 솔을 같이 누르면 제 각자의 음을 내면서 화음(和音)을 이룬다. 그런데 원소의 세계에서는 가벼운 기체인 수소, 마시면 상쾌한 산소, 그리고 검은 숯에 들어 있는 탄소를 조합하면 원래의 성질은 어디로 사라지고, 혼인 잔치의 포도주 같은 전혀 다른 물질로 변화(變化)된다. 그래서 원소 세계의 화합은 화합(化合)이다.
건반의 세계와 원소의 세계에는 또 다른 재미있는 공통점이 있다. 도에서 시로 가면 다시 도로 돌아온다. 마찬가지로 주기율표에서 나트륨, 마그네슘, 알루미늄, 실리콘, 인, 황 그리고 일곱 번째 염소 다음에는 다시 나트륨과 한 옥타브 차이 나는 칼륨이 온다. 한 옥타브 내에서 모든 음에 특이한 음색이 있듯이 원소의 옥타브 내에서도 원소들은 다 제 몫이 있다.
나트륨은 원래 광택이 나는 금속이지만 염소와 화합하면 우리 몸에 필수적인 소금이 된다. 마그네슘은 지구상 모든 녹색식물의 엽록소에 들어 있어서 햇빛의 에너지를 받아 탄수화물을 만드는 광합성의 첫 단추를 꿰는 역할을 한다. 가볍고 강도가 높은 알루미늄은 항공기와 우주 산업의 핵심 소재이고, 실리콘은 대지의 주성분이면서 아울러 반도체의 주역이다. 인은 인체의 골격도 만들고 DNA 이중나선의 골격도 만든다.
황은 단백질과 타이어에 적절한 견고성과 유연성을 동시에 부여해서 생을 가능하게도 하고 편하게도 한다. 나트륨과 함께 소금의 성분인 염소는 마시는 물의 소독을 통해 수많은 사람을 전염병으로부터 구했다. 그러고는 다시 소금과 비슷한 염을 만들면서 신경계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칼륨으로 돌아간다.
한편 도레미도와 도미레도가 다른 멜로디인 것처럼 포도주에서도 수소, 산소, 탄소는 결합 방식에 따라 흥을 돋우는 알코올이 되기도 하고 맛과 향을 내는 에스터가 되기도 한다.
한 가지 더. 악보에 쉼표가 있듯이 주기율표에는 모든 원소가 쉼을 찾는, 원소의 이상향이 있다. 염소와 칼륨 사이에는 쉬기를 좋아해서 귀족기체라 불리는 아르곤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 여덟 번째 족인 귀족기체가 되기 위해 모든 원소는 8을 지향하는 자연의 원리를 따라 열심히 화합을 실천한다. 이 원리는 옥타브와 어원이 같은 옥텟규칙이라 불린다.
원자들은 이 규칙에 따라 화합해서 여름의 마지막 장미가 되기도 하고, 우리 몸이 되기도 한다. 우리 몸은 우주의 별보다도 많은 개수의 원자가 화합(化合)을 통해 화합(和合)을 이루는 자연의 걸작인 것이다.
김희준 서울대 화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