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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37년 ‘7·7사변’ 발생

입력 | 2008-07-07 02:59:00


베이징(北京) 서남쪽 15km에 있는 루거우차오(蘆溝橋).

12세기 말 지어진 이 석조 다리를 두고 일찍이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세상에 그만큼 멋진 다리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281개의 돌기둥에 조각된 사자상은 모양이 워낙 다양하고 변화가 많아 ‘돌사자가 몇 개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 전해진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다리는 중국인들에겐 인근 중국인민항일전쟁기념관 석탑에 새겨진 ‘지난날을 잊지 말자(前事不忘)’는 표어로 상징되는 치욕의 장소이기도 하다. 중일전쟁의 도화선이 된 ‘7·7사변’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1937년 7월 7일 밤, 루거우차오 부근에 주둔한 일본군은 야간훈련을 실시하던 중 몇 발의 실탄사격 소리를 듣게 된다. 가상 적군과 공포탄을 주고받는 모의 전투훈련 속에서도 밤공기를 가르는 실탄 소리는 너무도 선명했다.

놀란 일본군은 즉시 훈련을 중단하고 점호를 실시했다. 그런데 병사 한 명의 행방이 묘연했다. 병사의 실종은 즉시 연대장에게까지 보고됐다. 사실 그 한 명은 부근 숲 속에서 용변을 보던 중이었고 그로부터 20분 뒤에 나타났다.

하지만 이미 일본군은 전투 준비태세에 돌입한 상태였고 어찌된 일인지 실종자 복귀 보고는 상부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대신 일본군은 중국 측에 중국군 관할지역에 들어가 실종자를 수색하겠다며 루거우차오 통과를 요구했다.

중국군은 이를 거절했고 일본군에겐 ‘단호히 전투를 개시해도 좋다’는 명령이 내려졌다. 8일 새벽 양국군은 루거우차오에서 첫 교전을 벌였다. 루거우차오를 뺏고 뺏기는 공방전을 벌인 뒤 양국군은 협상을 시작했고 11일 한때 정전협정이 성립되기도 했다.

하지만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군은 이미 만주와 조선의 병력을 대거 베이징 쪽으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중국과의 전면전을 벌이기 위한 시간 벌기용 협상을 한 것이다.

일본군 기계화부대의 전면 공격에 중국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중국은 베이징과 톈진(天津)은 물론 그해 12월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南京)마저 내주고 만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중국은 내전을 끝내고 국공(國共)합작을 통해 본격 항일전에 들어갔다.

사건의 발단이 된 실탄사격은 누구의 소행이었을까. 중국 측은 일본군 급진파의 소행으로, 일본 측은 중국군 내 위험분자의 짓으로 여겼다. 나중엔 소련의 지시를 받은 마오쩌둥(毛澤東) 부하들의 짓이라는 추측까지 나왔지만 진실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