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륵 드르륵…. 재봉틀 박음질 소리는 우리나라 산업화 시대를 견인한 원동력이었다. 박노해 시인은 ‘미싱’에 묶인 공장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시다의 꿈’이라는 시에 담기도 했다. 어머니의 재봉틀에서는 낡은 옷이 새 옷으로 변신했고, 때로 예쁜 가방이 만들어졌다.
현대에 사용되는 재봉틀의 기초를 발명한 이는 엘리아스 하우다. 하우는 1819년 7월 9일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태어났다.
재봉틀은 제1차 산업혁명 시기에 손바느질 작업을 주로 하던 의류 회사들이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만들고자 했던 기계다. 여러 사람이 발명을 시도했지만 상용화하기엔 기술적으로 완전치 않았다. 게다가 재봉틀을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사악한 기계’로 여겨 노동자들이 관련 공장을 두들겨 부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우가 재봉틀을 발명하게 된 계기는 지독한 가난이었다. 1840년대 초, 일을 해서 가족을 부양하기에 그는 너무도 병약했다. 대신에 하루 종일 삯바느질에 매달린 신혼의 아내를 유심히 관찰했다. ‘반복적인 단순 작업인데 기계가 할 수 없을까.’ 어떤 기계도 바느질하는 손과 팔의 움직임을 흉내 낼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윗실과 밑실의 결합으로 재봉되는 ‘본봉(lock stitch)’ 방식을 개발해냈다.
하지만 운명은 하우에게 몹시도 가혹했다. 작업실 화재로 당시로서는 거액인 300달러를 불길에 날려 보냈다. 1845년 어렵사리 설명회를 열어 자신의 재봉틀을 소개했지만, 단 한 대도 팔지 못했다. 이듬해 그는 특허를 들고 영국으로 건너갔으나 약소한 금액에 특허권만 겨우 팔고 터덜터덜 미국으로 돌아왔다. 귀국한 지 얼마 뒤 고생만 하던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희망, 일자리, 아내. 그 어느 것도 그의 곁에 있지 않았다. 낙담한 하우의 눈에 다시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바로 재봉틀이었다. 그가 영국 판촉 여행을 떠난 사이, 여러 발명가가 하우의 특허를 무단 도용해 재봉틀을 상용화했던 것이다. 가장 성공한 이는 ‘마케팅의 귀재’ 아이작 싱어였다. 싱어 재봉틀은 작동법이 달랐지만 하우가 특허를 낸 본봉 방식을 비롯해 유사한 바늘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됐다.
5년에 걸친 재판 끝에 싱어는 1만5000달러를 하우에게 배상했다. 또 하우는 미국에서 팔리는 재봉틀 한 대당 5달러의 로열티를 받기로 했다. 그는 10여 년을 꿈에 그리던 거부로 살다 1867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해 그의 특허는 소멸됐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