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공기업 개혁이 크게 후퇴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국전력공사의 발전 자회사와 한국가스공사 같은 주요 에너지 공기업의 민영화는 백지화됐다. 정부는 ‘일괄 추진’하겠다던 다른 공기업의 민영화도 담당부처 판단에 맡겨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방식으로 선회했다. 관료, 공기업 경영진, 노조의 뿌리 깊은 공생 구조 및 체질을 감안할 때 차라리 ‘민영화를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편이 솔직할 것이다. 수출입은행과 수출보험공사의 통합이 보류된 것을 비롯해 업무 영역이 겹치는 공기업 통폐합도 흐지부지되는 조짐이다.
공기업의 조직적인 로비와 노조의 엄포, 관료들의 태업(怠業)성 방관 속에서 개혁이 좌초된 역대 정권의 실패가 되풀이되는 형국이다. 촛불시위에 편승해 민영화 괴담을 퍼뜨리며 국민을 선동한 민주노총 등의 협박에 정부가 굴복한 모양새다. 청와대 관계자는 어제 “공기업 선진화는 예정대로 추진한다. 시늉만 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공허하게 들린다. 공기업들은 이미 개혁이 물 건너간 것으로 보고 축배라도 들 분위기다.
공기업들이 노무현 정부 5년간 ‘신이 내린 직장’의 꿀을 빨며 흥청망청하는 동안 방만 경영의 폐해는 극도로 심해졌다. 공기업 부실을 메우기 위해 정부가 지원한 돈이 48조8000억 원에 이른다. 국내총생산(GDP)의 10% 이상을 차지하는 공기업들이 비효율의 도(度)를 더해가고 있는 현실을 바로잡지 못하면 우리 경제가 재도약하기 힘들 것이라는 국민적 공감대도 폭넓게 형성돼 있다. 그런데도 꼬리를 내릴 바엔 몇 달간 민영화를 외치고 공기업 비리를 파헤치며 구조조정 방안을 마련한다고 법석이나 떨지 말지….
정부는 민영화 포기 이유로 요금이 올라갈 수 있다는 점을 들지만 이 문제는 이미 검토됐던 일이다. 영국은 통신사업을 민영화하면서 독립규제기구를 신설해 부당한 요금인상을 방지했고, 독일은 우정사업을 개방하면서 경쟁을 유도해 오히려 우편요금을 끌어내렸다.
정부는 “민영화가 계획대로 되면 지분과 자산을 매각해 벌어들이는 수입이 60조 원”이라며 이 돈을 중소기업 지원, 젊은 층 일자리 마련, 교육 등에 재투자하겠다고 했다. 그런 국가적 과제는 어떻게 추진할 것이며, 공기업 방만 경영에 따른 국민 부담은 얼마나 더 키울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