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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知논술/영화, 생각의 보물창고]‘미스트’

입력 | 2008-07-21 02:51:00


정녕 惡은 인간 속에 숨어 있는가

《아, 이토록 보는 이의 진을 빼는 영화가 또 있을까요? 스티븐 킹의 중편소설 ‘안개’를 원작으로 한 영화 ‘미스트(The Mist·2007년)’. 이 영화를 보고나면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힘들어져요. 영화를 통해 경험하는 아비규환의 지옥도는 몸서리칠 만큼 고통스러운 마음속 멍울이 되어 남기 때문이지요. 짙은 안개와 함께 물려든 정체불명의 생명체들에게 둘러싸여 대형마트 안에 고립된 인간들. 극한의 상황에 몰린 그들이 보여주는 처절한 모습은 ‘인간성(humanity)’이란 희망적인 단어가 아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암울한 생각까지 갖게 만들어요. 괴 생명체들이 그토록 잔인하고 무섭냐고요? 아니에요. ‘미스트’에서 오금이 저릴 만큼 무서운 대상은 따로 있어요. 그게 뭔 줄 아세요? 바로, 우리 자신이에요.》

“안개 속에 뭔가 있어”

괴물에 쫓겨 마트에 갖힌 채

서서히 미쳐가는 사람들

[1] 스토리라인

강력한 허리케인이 지나가고 난 뒤의 호숫가 마을. 화가인 데이비드(토머스 제인)와 아들 빌리는 파손된 집을 수리할 재료와 음식을 사기 위해 시내 대형마트로 갑니다.

돌연 한 치 앞을 식별할 수 없을 만큼 짙은 안개가 마을을 덮칩니다. 피투성이가 된 노인이 마트 안으로 달려 들어옵니다. “안개 속에 뭔가 있어!” 안개 속엔 촉수가 달리거나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괴이한 생명체들이 몸을 숨기고 있었지요.

졸지에 마트 안에 갇히게 된 사람들. 일부는 마트를 벗어나기 위해 밖으로 뛰쳐나가지만 괴물들에게 잔혹하게 도륙될 뿐입니다. 미래를 가늠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극도의 공포에 시달리고, 급기야 마트 창문을 뚫고 들어온 괴 생명체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변해갑니다. 절망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생깁니다. 광신도인 카모디(마샤 가이 하든) 부인은 “죄를 진 우리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된 것이다. 괴 생명체들은 주님이 보낸 사신(死神)”이라면서 사람들을 불안 속에 빠뜨립니다.

데이비드를 비롯한 몇몇 사람은 “이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호소하지만, 어느새 사람들의 정신적 주인이 돼버린 카모디 부인은 “피의 희생이 필요하다. 주님의 뜻에 역행한 이들을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선동하면서 데이비드 일행을 괴물들에게 제물로 바치려 합니다.

천신만고 끝에 마트를 빠져나온 데이비드 일행은 자동차에 올라탑니다. 괴물들을 피해 차를 달립니다. 하지만 데이비드에겐 생각지도 못했던 끔찍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2] 핵심 콕콕 찌르기

‘미스트’는 괴물이 등장하는 여느 공포영화와는 사뭇 다릅니다. 물론 잔인무도한 괴물들이 나오긴 하지만, 이 영화가 주는 공포의 근원지는 괴물이라는 타자(他者)가 아니지요. 진정 무서운 대상은 마트 안에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 바로 우리 인간들이에요.

영화 속에서 목숨을 잃어가는 사람들을 보세요. 정작 괴물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보다 마트에 함께 고립돼 있던 같은 마을 사람들의 광기에 살해당하는 사람이 더 많아요. 그들이 이성을 잃지 않고 마음을 한데 모았더라면 희생을 최소화할 수도 있었을 테지요. 하지만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사분오열됐고,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한 사람들은 어느새 저 밖에 있는 괴 생명체들보다 더 무섭고 더 악마적인 괴물로 스스로 변해갔지요.

어때요? 이 영화를 보면 인간은 선과 악으로 나뉘는 게 아니에요. 본래부터 나쁜 놈과 선한 놈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에요.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맞닥뜨렸을 때, 자신과 이성을 잃어버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뉠 뿐이에요. 다시 말해, 공포에 대한 내성(耐性·환경조건의 변화에 견딜 수 있는 성질)이 다를 뿐이란 얘기지요. 두려움에 영혼을 잠식당해 광적인 믿음에 자신을 내던지고 동료를 제물로 바치려 하는 사람들, 그들을 과연 “나쁘다”고만 단정 지을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들은 그저 ‘나약한’ 존재에 불과한지도 몰라요.

그래요. ‘미스트’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이것이었어요. 우리 인간 안에 저주처럼 숨어 있는 괴물성, 이건 인간이 나약한 동물이기에 비롯되는 피할 수 없는 존재적 한계이지요. 이 영화는 마트라는 폐쇄 공간에 갇힌 인간들이 한계상황을 맞아 괴물적 본성을 드러내는 과정을 마치 동물행동학 연구를 하듯 침착하게 관찰해요. 그러면서 ‘인간은 한낱 나약하고 불완전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뼈아픈 사실을 우리가 피부로 느끼고 인정하도록 만들지요(아, 그래서 이 영화가 진짜 잔인한 거랍니다).

이제야 영화 제목인 ‘미스트(안개)’에 담긴 속뜻을 알겠네요. 안개란 ‘앞을 볼 수 없는 상황’, ‘미래를 알 수 없는 예측불가의 불확실성’을 뜻하는 영화적 은유였네요.

결국 인간이 갖는 근원적 공포는 괴물 같은 자기 밖의 어떤 존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었어요. 공포의 씨앗은 내 안에 있었어요. 나 자신의 운명을 내다보지 못하는 불안감과 두려움, 그 자체가 가장 강력한 공포의 진원지였던 것이지요. 지금 여러분 안에는 어떤 공포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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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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