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같은 삶/님 웨일스, 김산 지음/동녘
《“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도 실패의 역사였다. 나는 단 하나에 대해서만-나 자신에 대하여-승리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계속 전진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얻는 데는 이 하나의 작은 승리만으로도 충분하다.” 》
조선인 독립혁명가의 고뇌,투쟁,사랑
1937년 초여름 중국 옌안. 신문기자 출신으로 중국에 머물며 혁명가들의 자서전을 쓰던 님 웨일스란 미국 여성은 우연한 기회로 김산이란 32세의 조선인을 알게 된다.
장지락이란 본명을 가진 그는 중국 내에서 항일운동을 펼쳤던 혁명가. 님 웨일스의 끈질긴 요청으로 이뤄진 두 사람의 만남에서 그녀는 자신을 매료시킨 그의 삶을 책으로 쓰겠다고 결심한다.
이 책은 김산이 평양 교외의 농가에서 태어나 혁명가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전기적 형식으로 풀어냈지만 그의 애환과 철학적 사색 등이 문학적으로 녹아 있다.
‘틀림없이 나에게도 한때 아주 젊었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내 기억으로는 위대한 첫사랑의 연인을 만났던 시절도 매우 젊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 연인과 헤어져 버리기도 전에 나는 이미 늙어버렸다.’
투쟁과 패배의 경험들로 실제보다 훨씬 더 늙어버린 젊은 혁명가 김산의 회상으로 시작되는 이 책의 첫머리는 휴머니즘과 진리, 근면의 윤리 등 보편적인 가치에 성실했던 한 혁명가의 진솔한 인간미를 잘 보여준다.
그의 어린시절은 두꺼운 초가지붕을 통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소리를 들으며 따끈따끈한 아랫목에 누워 있던 ‘아늑한’ 기억과 군불을 땔 장작을 일제에 약탈당하고 왜놈에게 어머니가 구타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비참한’ 기억이 공존한다. 이후 그의 육성으로 3·1운동, 관동대지진 후 조선인 대량 학살 등 비장한 역사적 사건을 생생히 되짚어볼 수 있다.
하지만 가출한 그의 학비를 대주는 인정 많은 둘째 형이 가족들에게 ‘반항아적 기질’을 키운다는 비난을 듣는 부분이나 도쿄 유학시절 학비를 벌기 위해 고물상을 하며 겪는 일화 곳곳에선 세련된 유머나 낭만이 느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그가 본격적인 비밀지하운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역사서만으론 알기 힘든 혁명의 현장, 생활상까지 재구성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이 책의 큰 장점이다.
일본으로부터의 해방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맞물리게 하기 위한 그들의 엄숙한 투쟁과 함께 혁명가들의 연애와 우정, 불신과 배반 등의 인간 드라마도 펼쳐지기 때문이다.
인류의 짐을 어깨에 진 것처럼 살면서 연애도 거부했던 그가 맞이한 아름다운 첫사랑, 일본 경찰에 체포된 후 오히려 당원들에게 의심을 받게 되는 억울한 상황, 배신감과 좌절을 극복하며 사상적, 철학적 단련으로 성숙한 지도자로 다시 서는 과정 등이 생생하다.
김산이란 한 인간이 입체적으로 되살아날 뿐 아니라 격동기를 살아가던 혁명가들의 숨결까지 느껴질 것 같다.
이 책을 추천한 여행작가 조창완 씨는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옌안 등 김산의 발자취를 답사한 적이 있다”면서 “그가 극비리에 처형됐을 옌안 근처의 고산 평원을 찾았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의 삶을 씨줄과 날줄로 만들어 중국 내 항일운동 유적지를 찾다보면 김염, 김원봉, 신채호 등 수많은 애국자들의 삶에도 근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