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인간과 동물의 관념은 얼마나 다를까? 아마도 가장 큰 차이라면 두려움을 느끼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생각이 많은 쪽일수록 죽는 과정이나 죽음 뒤의 세계에 대해 두려운 감정을 더 많이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 생각이 깊지 않을 성싶은 동물의 경우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인간보다는 덜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경험상으로도 사람이 죽은 뒤의 모습은 굉장히 끔찍스럽고 고통스러워 보일 때가 많지만 동물은 살아 있을 때와 표정의 변화가 별로 다르게 읽혀지질 않는다. 그런 동물의 모습을 늘 지켜보아야 하는 나로서는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소가 도축장에 끌려갈 때 눈물을 흘린다는데 사람의 느낌이 이입돼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대관령에서 일할 때 수많은 젖소를 도축장에 직접 데려가 본 나로서는 한 번도 소의 눈물방울을 본 적이 없다. 개장수가 오면 개들이 알아서 꼬리를 사리는 것 역시 육감이라기보다는 그들에게서 풍겨 오는 수많은 다른 개의 냄새 때문이라는 편이 더 정확한 이유일 것이다.
경험상으로 볼 때 죽음에 대한 동물의 관념은 인간에 비해 그리 심각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동물은 먹이를 능동적으로 찾는 일처럼 죽음을 자발적인 선택의 영역쯤으로 두지 않나 싶은 의구심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최근에 내가 일하는 동물원에서 일어난 몇몇 사건이 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다람쥐원숭이가 오랜만에 새끼를 낳았다. 다람쥐원숭이는 이름 그대로 다람쥐만큼 작고 앙증맞은 원숭이인데 막 낳은 새끼를 등에 업고 다닌다. 어느 날 업고 다녀야 할 새끼를 어미가 안고 있었다. 새끼의 머리는 아래로 축 처진 상태였다. 새끼가 죽은 게 틀림없었다. 그런 모습을 관람객에게 보여줄 수 없어 긴 장대를 휘둘러 죽은 새끼를 강제로 빼앗았다.
새끼를 빼앗긴 어미는 1주일 동안 구석에 처박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먹이에도 전혀 입을 대지 않더니 기어이 망부석처럼 그 자리에 앉아서 죽고 말았다. 부검을 했더니 죽음을 부를 만한 어떠한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분명 의도된 죽음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또 기증받은 애완용 토끼가 한 마리 있었다. 동물원에 처음 오면 철창 사이로 다른 토끼와 분리해 놓고 얼굴을 익히는 기간을 둔다. 일손이 부족한 주말인 데다 유난히 토끼가 건강하게 보여 사육사가 기존 토끼 무리에 합류시켜 버렸다.
토끼는 얌전하고 평화롭게 보이지만 텃세가 강한 동물로 유명하다. 이 토끼 역시 사육사가 없는 주말 저녁에 호된 신고식을 치렀는지 다음 날 아침에 가보니 털이 많이 엉킨 채 한쪽 구석에 쭈그리고 있었다.
새로운 환경에 정착해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거니 생각해 따로 빼내지 않고 그곳에서 잘 이겨내기를 바랐다. 하지만 며칠 안 가서 새로 온 토끼는 죽고 말았다. 다람쥐원숭이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상처도 없었는데 말이다. 무리에서의 따돌림이 빚은 ‘상심 증후군(broken-heart syndrome)’ 때문이라 생각한다. 집안에서 오냐오냐하고 키운 애완동물일수록 그 정도는 더욱 심하다.
인간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겪은 후 고민하다가 간혹 자살한다. 비록 그 지경까지 가지 않더라도 강한 스트레스가 트라우마(trauma·마음의 상처)를 남겨 질병을 부르고 수명을 단축시킨다. 동물과의 차이라면 동물은 인위적인 죽음을 선택함에 있어 인간보다 좀 덜 고뇌하리라는 점뿐이다. 물론 인간의 관점에서 그렇게 보인다는 얘기다.
최종욱 과학칼럼니스트 광주 우치동물원 수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