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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이병기]퍼펙트 스톰

입력 | 2008-07-22 03:01:00


요즘 외신에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어려운 경제 상황을 압축한 말이다. 초대형 태풍을 뜻하는 이 말은 2000년 조지 클루니가 주연한 재난영화가 나온 이후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1991년 미국 대서양 북부 글로스터 근처에서 실제 발생한 폭풍을 바탕으로 한 소설 퍼펙트 스톰(1997년)을 각색한 것이다. 많은 이에게 이 영화는 단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로 각인돼 있다. 천둥과 번개가 쉴 새 없이 내리꽂는 칠흑 같은 바다, 악마가 연상되는 거대한 파도, 파도의 정점 바로 아래 뒤집어지기 직전의 어선이 수직으로 서 있는 장면이다.

유가가 100달러를 넘어서면서 한국도 퍼펙트 스톰의 영향권에 다가서고 있다. 고유가는 등골이 휘도록 일해도 손에 쥔 돈은 갈수록 쪼그라드는 상황을 부른다. 자원도 없고 인상된 제조원가를 남에게 전가할 브랜드 파워나 기술이 부족한 한국은 특히 그렇다.

태풍은 또 있다. 다시 거세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후폭풍이다. 미국 부동산 가격이 급전직하하면서 세계 경제의 엔진, 미국의 경기도 내려앉고 있다.

밖에만 폭풍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부동산 가격도 폭락할 수 있다. 일본처럼 부동산 가격이 단기간에 무너지면 금융기관의 부실과 수많은 가정의 파산을 피하기 어렵다. 인플레 기대심리도 한번 고착되면 소멸되기까지 몇 년이 걸리는 폭풍이다.

최악의 상황은 따로 있다. 너무 민감해서 일부 경제 전문가들이 아직은 사석에서만 꺼내는 주제다. 태풍 몇 개가 결합될 때다. 경상수지 적자는 감당할 수 없이 커진다. 외국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가 금융시장에서 먼저 경보음이 울릴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황을 열거하는 것은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우선 선장인 대통령부터 나서야 한다. 위기의 실체를 과장 없이 설명하고 선장이 먼저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위기 극복의 리더십을 가질 수 있다.

선장은 자신을 위한 짐은 모두 바다에 내던져야 한다. 이것이 선행돼야 각종 규제, 직역 이기주의, 기득권, 반(反)시장주의 등 항해를 방해하는 짐을 버려 달라고 선원들에게 호소할 수 있다. 순풍이 불 때는 이런 짐을 싣고도 항해가 가능했다. 하지만 위기 상황에는 이런 짐들을 버려야 역풍을 헤쳐 나갈 출력을 얻을 수 있다.

감동은 필수조건이다. 감동만이 돌아선 선원들의 마음을 여는 열쇠다. 다수의 마음을 얻어야만 대안도 없이 ‘세계화 속의 항해’를 부정하는 세력이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을 잠재울 수 있다. 항해사인 기획재정부 장관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세심하게 키를 조정해야 한다. 또다시 배를 난폭하게 몰아 뱃멀미를 일으키면 외국인 승객들은 구명정을 타고 배에서 탈출할 수 있다.

기관사인 기업과 근로자들은 생산성을 높여 최고로 효율적인 엔진으로 바꿔야 한다. 혼자 살겠다고 부담을 소비자나 사회적 약자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

가장 다급한 것은 선장의 인식 전환이다. 만선(滿船)을 약속하고 출항하던 순간은 깨끗이 잊어야 한다. 변화된 환경은 ‘단 한 명의 희생 없이 폭풍을 견뎌내는 것’을 선장의 최우선 임무로 요구하고 있다.

위기관리대책을 하나 둘 실천하다 보면 만선은 저절로 따라올 수 있다. ‘꼼수’의 유혹을 물리치고 우직함을 지킬 때만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을 기대할 수 있다.

이병기 경제부 차장 ey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