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복제시대 예술 ‘사진’을 말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각종 언론 매체에 소개되는 미술전시들 중 상당부분이 사진에 관한 전시이다. 한 인터넷 매체의 조사에 따르면 미술계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 전시분야는 회화이고, 그 다음이 사진이라고 한다.
그만큼 사진은 디카에 열광하는 대중들만큼이나 작가나 갤러리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미술장르 중 하나가 되었다.
사진전을 구경하러 간 사람이라면 전시 카탈로그에서 으레 마주치는 단어가 있는데, 바로 ‘아우라(aura)’이다. 이 단어는 지금으로부터 약 70여년이 조금 넘은 때에 발터 벤야민(1892∼1940)이라는 독일의 한 이론가의 저술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이라는 글에서 아우라를 예술작품에서 흉내 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라고 정의 내렸다.
이에 따르면 아우라는 유일한 원본에서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무한정 복제가 가능한 사진에서는 생길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갤러리에 걸린 사진을 아우라가 있는 예술작품으로 당연하게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만일 갤러리에서 전시되는 유명 작가가 찍은 사진이 무한히 복제되는, 즉 고고한 아우라가 있을 수 없는 이른바 ‘가짜’중 하나라면,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으로 가짜를 구입하려는 수집가들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진은 아우라, 다시 말해 예술작품의 진품성을 파괴한 주범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작품의 아우라가 드러나도록 만들어준 공신이 아닐까? 이 질문을 긍정해보면, 아우라는 사진의 등장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것 덕분에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달리 말해 가짜라는 개념 없이 진짜라는 개념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찍는 디카 사진과 달리 갤러리에 전시되는 이른바 예술작품으로서의 사진들은 회화나 조각에 못지않게 두터운 아우라에 둘러싸여 있다. 오늘날 사진작가들은 회화 작가가 조각가 못지않은 명성을 지니고 있고, 그들의 사진은 이상하게도 아우라가 있는 진품으로 추앙 받아 비싼 액수에 거래된다.
그래서 어떤 사진작가는 진품에서만 드러난다는 아우라를 만들어내기 위해 필름에 일부러 자국을 남기거나 그것을 파기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어떤 이는 사진의 등장으로 미술의 장르가 확대되었다고 환영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태생적으로 복제가능 한 사진에까지 아우라를 입혀서 갤러리에 들여보내는 것은 사진 본연의 임무에 위배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판단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회화나 조각 등 오래된 미술장르들이 사진의 유입으로 인해 표현의 범위가 확대되어 작품 내용이 풍부해진 것도 사실이고, 언제부턴가 사진에도 ‘한정판’이라는 딱지가 붙어 그것의 아우라를 돈 주고 구입해야 하는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박 대 정
유쾌, 상쾌, 통쾌 삼박자가 맞아
떨어지는미술 전시를 꿈꾸는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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