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꽝∼ 꽝∼.”
일제 패망 직전인 1945년 7월 24일 경성부(서울 중구 태평로1가) 부민관에서 다이너마이트로 만든 사제폭탄 두 개가 잇따라 터졌다.
일본 중의원까지 지낸 친일파 박춘금이 조직한 대의당(大義黨) 주최로 이곳에서 열리고 있던 친일 어용대회인 ‘아세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는 아수라장이 됐다.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등 대한애국청년단 단원들이 공사장 발파용 다이너마이트를 입수해 일본 조선 만주 중국 등의 친일파가 참가한 친일 어용대회를 분쇄한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에는 일제의 보도 통제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경성 한복판에서 일제와 친일파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대표적인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거로 꼽힌다.
그런데 박춘금은 이 폭파 의거 때 목숨을 건졌고, 1992년에는 한 일본인에 의해 경남 밀양에 송덕비가 세워지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있었다.
한편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은 광복 이후 활발한 민족주의 운동을 벌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그는 2006년 골수종과 혈액암 진단을 받고 힘겨운 투병생활 끝에 2008년 2월 유명을 달리했다.
부민관은 경성부가 1935년 부민들의 예술적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건립한 부립극장이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이뤄진 한국 최초의 근대식 다목적 회관으로서 1800여 관람석의 대강당을 비롯해 중강당, 소강당 등에서 연극, 음악, 무용 등이 공연됐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뒤 미군이 접수해 임시로 사용하다 1949년 서울시 소유가 됐고 1950년 4월 29일 국립극단이 창단되면서 국립극장으로 지정되었다.
1950년 서울 수복 뒤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다가 1975년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준공되면서 시민회관으로, 1976년 세종문화회관 건립과 동시에 그 별관으로 쓰였고, 지방자치제 실시에 따라 1991년부터 서울시의회 의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문 계단 아래 화단에 ‘부민관 폭파 의거 터’ 비가 세워져 있지만 지나가는 행인 중 눈여겨보는 이는 과연 얼마나 되고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안영식 기자 ysa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