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걷는다/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효형
《“자동차가 주요 이동수단이 된 이후 거리 개념이 변질되어 이제 얼마라는 식으로만 표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보행자는 ‘멀지 않다’ ‘바로 옆이다’ ‘십 분 걸린다’는 표현을 제대로 해독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게 자동차로 갈 때를 기준으로 한다. ‘십 분’은 10 내지 12킬로미터, 즉 걷는 것으로 따지면 두 시간에 해당한다.”》
실크로드 도보횡단서 ‘사람’을 만나다
62세 프랑스인이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1만2000km를 걸어서 횡단한다고 하면 자연스럽게 ‘고행’이란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30여 년간 프랑스의 르 피가로 등 유력 일간지의 기자로 일하다 은퇴한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4년에 걸쳐 매년 봄부터 가을까지 실크로드를 걷기로 작정한다.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 도전이다.
하지만 이는 어떤 대단한 성공이나 위업의 달성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새로운 얼굴, 새로운 삶에 대한 고집스럽고 본능적인 욕망 때문이다. 군중의 물결 속으로 밀려들어가 더 빨리 뛰어다니길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동방법인 걷기는 접촉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 유일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마치 유럽에서 아시아 동쪽 끝까지 연결하는 가늘고 질긴 실처럼, 실크로드라는 역사적 길을 순례한다. 그 길에는 터키에 항거하는 쿠르드족 마을, 이란, 투르키스탄 등 위험할 수 있는 지역도 포함돼 있다.
“여행자들에게 그들만큼 주의를 기울이고 식사를 대접하거나 여행자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그들만큼 신속한 이들은 없다”고 전해지는 터키인의 전통처럼 그는 종종 사람 좋고 순박한 이들에게 대가 없는 환대를 받는다.
하지만 때로 ‘걸어서 간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모습은 도저히 이해받지 못하는 괴짜로 비치기도 하고, 때로는 분쟁 지역에 잠입한 스파이나 테러리스트 등으로 오인받기도 한다. 오랜 여행으로 탈수에 화상을 입기도 하고, 균에 감염돼 응급실로 실려 가기도 한다. 때로 도둑이나 강도를 만나기도 하고 미친 사람들에게 위협을 당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산을 오르내리고 사막을 횡단하다가 질병, 상처, 자연재해, 도둑 혹은 전쟁으로 예고도 없이 죽어 간 이들을 떠올리며 실크로드를 거쳐 간 문명의 부침을 되짚는다.
은퇴 후 찾아온 고독하고 쓸쓸한 삶, 10여 년 전 배우자를 잃고 자녀들은 이미 성인이 돼 함께 있을 때조차 각자 혼자임을 인식한다. 하지만 그는 TV와 책 몇 권이 놓인 안락한 거실에서 노년기를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 500여 년의 역사가 응축된 그 길을 걷고, 또 걸으며 사람과 삶, 역사와 문화를 탐색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살아 있음을 실감하는 벅찬 일이다.
이 책을 추천한 여행 작가 김완준 씨는 “그는 길을 걸어가는 동안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고 타인에 대한 적의를 품은 이들로부터 봉변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말은 한마디도 통하지 않지만 가족처럼 자신을 걱정해 주는 아름다운 사람도 여럿 만난다”면서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훌륭한 성찰기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여행기에서는 드라마틱하거나 충격적인 에피소드는 많지 않다. 그 대신 담담하고 소박한, 사색적인 이야기들이 버무려져 있다. 마치 앞을 향해 조금씩 꾸준히 나아가며 걷는 것처럼.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