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는 결함 아닌 다름일 뿐
‘편견의 벽’ 넘어 손을 내밀다
악보? 필요 없다. 악기 다루는 법? 몰라도 된다. 스크린 앞에서 내키는 대로 얼굴을 흔들면 나만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웹 카메라가 움직임을 인식해 디지털 음악을 연주한다.
얼핏 보면 훌라후프를 반으로 잘라놓은 운동기구 같다. 자리에 앉아 손잡이를 잡으면 심장박동수에 따라 종소리가 울린다.
미술관이 아니라 진기한 놀이동산에 온 것 같다. 관객 참여적 미디어 작품들이 시각 청각 촉각을 넘나드는 흥미진진한 체험을 선사한다. 8월 24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 토탈미술관 본관 B층(02-379-3994)에서 열리는 ‘thisAbility vs Disability’전. 국내외 미술가 10개 팀이 참여한 전자예술 국제전으로 ‘다양한 관점에서 장애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보여준다.
#‘창의적 감각으로 장애를 만나다’―테크놀로지가 이어준 다리
동정하거나 혹은 불편하거나. 모두 장애를 보는 비틀린 시각이다. 토탈미술관 전시는 과학과 예술을 결합한 전자예술의 형태로 시각 교정을 돕는다. 전시를 기획한 전병삼 씨는 말한다. “장애와 비장애를 가르는 것부터 문제다. 장애가 없다고 우월하거나, 있어서 열등한 것도 아니다. 이런 구분을 하는 판단 기준을 문화적으로 교란시켜 기준 자체를 없애자는 취지다.”
전시는 ‘장애는 결함이 아닌 다름’이라고 강조한다. 작품들도 장애와 비장애,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누구든 공평하게 체험하고 공감할 수 있다. 바람의 감촉을 통해 손으로 ‘보는’ 그림(드미트리 스트라콥스키의 ‘경계의 재정립’), 촉각을 이용해 빛의 그림을 그리는 테이블(이재민 씨의 ‘물빛’), 목소리를 감지해 움직이는 로봇(김기철 씨의 ‘WRAP’) 등. 관객들은 디지털아트를 체험하면서 소통의 통로에 한발 들여놓는다.
“미적 표현 이상으로 예술이 가진 또 다른 중요한 의미는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해 사고의 틀을 확장하는 데 있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장애에 대한 정형화된 고정관념을 깨고, 서로의 다름을 가슴으로 인정하며 상대방을 이해하는 데 더욱 자유로운 시선을 얻는 계기를 마련하고 싶다.”(전병삼)
#고립과 소통을 오가다―손으로 이어준 다리
어린 시절의 실전화기가 떠오른다. 마주 보는 벽에 걸린 두 작품은 수십 가닥의 실로 이어져 있다. 왼쪽 벽엔 사지가 변형된 실인형들, 오른쪽엔 장애가 없는 인형들. 소통을 꿈꾸는 듯, 인형들은 일대일로 짝을 이뤄 연결돼 있다.
8월 7일까지 서울 강남구 역삼동 역삼1문화센터(02-558-6629)에서 열리는 ‘선으로 만드는 세상’전에 참여한 전윤조 씨의 설치작업 ‘자기반영’. 작가의 내면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작품은 소통의 화두를 건네준다. “나는 청력장애인이다. 말문을 열기 전에는 나를 평범하게 인식하지만 발음을 듣고선 눈빛과 표정이 미묘하게 변화한다. 일종의 ‘편견’을 갖고 바라본다. 이런 이중적 경험이 ‘나는 장애인인가 비장애인인가’ 질문을 하게 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파고든 그는 가늘고 약한 면사를 이용해 장애와 비장애 인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손으로 실을 감아 수없이 인형을 만드는 노동집약적 과정, 긴 시간과 반복적 노동이 주는 고통이 왠지 친숙했다. ‘사과’란 단어를 이해하고 발음을 외우기까지 800번 이상 반복하는 언어훈련과 닮은꼴이었던 것. 고된 나날이 쌓인 끝에 서울대 조소과, 미국 몽클레어 주립대 석사과정을 마쳤다. 탄탄한 실력을 인정받아 2004년 미국 조앤 미첼 재단의 예술지원금을 받았고 지난달 개인전도 열었다.
그를 장애 작가란 울타리로 가두는 것은 위험하다. 그의 작품은 개인의 이야기를 뛰어넘어 누구나 겪는 고립과 소통의 문제를 성찰하게 한다. “내 작품은 신체적 결함으로 인한 심리적 고립과 소통의 제한으로 인한 경험의 순간에 대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순간은 나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겪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긴 끈을 매달고 힘겹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표현한 ‘길’. 무리지어 다니면서도 고립감에 사무치는 현대인의 불안한 내면이 피부에 와 닿는다.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는 타당한 것인가. 두 전시는 장애를 이유로 인간 사이에 장벽이 존재할 이유가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고 답을 구해 보는 자리다. 보이거나, 안 보이거나 누구에게나 장애는 있다.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면 그는 아마 한참 동안 제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은 사람이리라.
“사람들이 장애가 있고 없고의 차이를 크게 느낀다면 이는 오해에서 비롯된 듯하다. 단지 일상생활에서 살기가 불편하다는 의미일 뿐인데 사람들은 ‘장애’를 낯설게 본다. 이렇게 ‘낯설게’ 보는 관점이 ‘차이’를 크게 느끼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아닌가 싶다.”(전윤조)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