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으로만 가는 게가 있었다. 이를 비웃던 다른 게가 자신은 반대로 간다고 한다. 앞으로 못 가기는 마찬가지다. 다음 순서는 서로를 비난하고 책임을 떠넘기는 일이다. 한심한 정치판과 논객은 이런 식으로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지만 사회 발전은 그만큼 더뎌진다.
우리 경제가 걱정스러운 이유는 지금 경기가 나빠서가 아니라 전망이 더 암울하기 때문이다. 정권을 잡은 사람이나 반대하는 사람이나 경제를 앞으로 밀고 나갈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상대를 탓하기에 급급하다.
나이 든 사람이 박정희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그래도 그때는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진다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외환위기 이후 이런 자신감으로 살아온 국민이 몇 퍼센트나 되는가. 그래서 정치꾼 냄새가 덜 나는 후보, 고도성장 기적을 재현할 신기가 있어 보이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기대를 걸었고,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커졌다.
이명박 정부의 초반 실책 중 하나는 소위 ‘올드보이(Old boy) 경제학’을 둘러싼 게임에서 자살골을 넣었다는 점이다. 성장률 목표를 정하고, 필수 품목의 물가를 관리하고, 외환시장 개입을 통해 수출을 독려하고, 대통령과 기업인 간에 직통 전화를 개설하고, 대기업과 은행 간의 거리를 좁히려 하고, 운하를 파서라도 당장 일자리를 만드는 정책이 최선의 분배라 믿는 등 이 정권의 경제 접근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박정희 시절과 유사했다. 그런데 세간의 평가는 온통 질책과 조롱뿐이다. 고도성장의 주역이었던 올드보이의 주가도 덩달아 떨어졌다.
시장의 한계와 정부의 효율성
보수 엘리트들은 이명박 정부가 보수답지 않다고 비판한다. 보수 정권에 걸맞게 시장을 강조하는 미국식 신자유주의 기조로 가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시장의 장점을 내세우는 것은 보수의 전유물이 아니다. 경제가 커지고 개방되면서 가격의 자원 배분 기능이 중요해지는 현상은 이념을 넘어서는 문제다.
아무리 진보적인 정부라도 시장을 대체하긴 어렵다. 문제는 시장의 한계를 누가 더 잘 이해하고 대처하는가이다. 이는 정부의 효율성을 의미한다. 시장의 한계나 정부의 역할은 교과서나 다른 국가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제도나 환경에서 판단할 문제다. 쉬워 보이지만 쉽지 않은 과제다.
올드보이가 성공했던 이유는 밖으로 눈길을 돌리면서도 매우 ‘한국적’인 정책을 폈다는 데 있다. 단순히 수출을 강조하지 않고 이를 부족한 국내 인프라와 정보를 보완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막연히 신용 배분을 통제하지 않고 투자위험을 흡수하고 거시안정을 유지할 방안을 함께 생각했다.
특정 기업에 혜택을 주되 성과가 다른 기업에도 전파되도록 정부가 매개 기능을 했다. 성장만 내세우지 않고 사회 안정을 위한 암묵적인 민생대책을 함께 생각했다. 교육제도는 단순했지만 성장인력 확보와 신분 상승의 유인으로 작용하기에 충분했다.
다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열악한 초기 여건하에서 성장 재원과 인프라를 조성하고 경제주체 간의 경쟁과 협력을 이끌어낸 실력은 인정해야 한다. 이들의 정책을 오늘의 경제에 쉽게 적용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교훈은 넘쳐흐른다. 정부의 시장 개입은 편익이 비용보다 클 때 정당화된다.
이명박정부 지식-정보 공유를
올드보이의 정책은 대체로 이 관문을 통과했다. 부족한 시장을 키워 보려고 정부가 나섰지만 적절히 물러날 줄 알았다. 요즘은 멀쩡한 시장을 정부가 대체하겠다고 나서거나 시장에 맡기면 모든 것이 균형을 찾는다고 믿는 사람뿐이다.
이명박 정부가 올드보이에게서 제대로 배우려면 옛날 방식을 답습하지 말고 그들의 집합적 지혜를 헤아려야 한다. 올드보이 경제학에서 백미를 꼽으라면 중지를 모으는 지혜다.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과정에서 정책 실패의 위험을 최소화했던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정치가 민주화되면 경제정책은 더 권위주의적으로 밀실에서 만들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뻔한 식견의 학자나 뻔한 공식의 관료 몇 명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시장을 알고 정부를 알고 이론을 알고 역사를 아는 사람이 함께 모여야 한다. 지혜는 여러 사람의 머리와 경험에서 나오는 법이다.
전주성 이화여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