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으로 본 음식의 문화사/케네스 벤디너 지음/예담
《“어느 날 아침,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에 입장하기 위해 줄을 선 내 앞에 몸무게가 130kg은 족히 됨직한 남자가 서 있었다…과연 그는 예상대로 생선, 햄, 파이, 포도, 거위고기, 소시지 등을 묘사한 작품들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처음에 손가락질하던 그는 이내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음식그림에 버무려진 서구문화 속살
미국의 예술사학자인 저자는 음식을 등장시킨 서양 미술사에서 음식의 문화사를 노련하게 읽어낸다.
책에 등장하는 그림은 대체로 시대 순을 따랐지만 구성이 독특하다. 저자는 음식의 수집과 판매, 음식 준비, 식사 등을 주제로 한 그림을 차례로 소개한다. 음식을 사는 시장, 요리하는 주방, 음식을 먹는 식당을 묘사한 그림이 단계적으로 등장해 인류 역사의 ‘식사 시간’을 보는 것 같다.
책에 등장하는 14세기 유럽 르네상스∼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그림 150여 점을 보는 재미만도 쏠쏠하다.
음식물의 재료인 죽은 동물이, 살아 있는 인간보다 중시된 최초의 그림은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아르천의 ‘푸줏간의 진열대’(1551년)이다. 소시지, 돼지 다리, 양 다리, 내장, 소머리, 돼지머리, 닭고기 등이 그림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푸줏간 내부 풍경에서 당시 유럽인의 식생활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그림 저 멀리 조그맣게 성가정(성모 마리아, 요셉, 예수로 이루어진 거룩한 가정)을 은유한 가족의 모습이 보인다. 세속적 음식이 종교적 주제보다 훨씬 크게 그려진 이 작품은 유럽 사회의 세속화를 반영한 그림으로 해석된다.
18세기 교역이 늘고 물자수송이 원활해지면서 중세의 대기근은 사라졌다. 한 지역에서 식량이 제대로 생산되지 못하면 다른 지역에서 곧바로 수입할 수 있게 됐다. 식량 공급이 안정되자 음식의 맛은 심미적 취향을 뜻하기 시작했고 왁자지껄 풍요로움을 강조하던 서양 미술은 세련된 식사 장면을 묘사하기 시작한다.
프랑스 화가 니콜라 랑크레의 ‘햄이 있는 점심 파티’(1735년)는 식탁 위에 차린 음식이 술과 안주인 햄과 빵뿐인데도 포크와 나이프가 놓여 있다. 평범한 포도주 잔치에도 이 시기 포크를 널리 썼다는 것을 보여준다. 독일 화가 아돌프 폰 멘첼의 ‘무도회의 만찬’(1878년)은 유럽의 궁정에서 뷔페 형식의 식사가 생겨났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그림에 등장하는 음식의 상징에 대한 이야기도 풀어낸다. 사과가 대표적이다. 네덜란드 화가 휘호 반 데르 흐스가 그린 ‘아담과 이브’(1470년경)를 보자. 아담과 이브가 과일을 먹은 죄악은 성교 행위를 은유했다. 아담과 이브는 이 그림에서 음탕한 느낌의 누드로 서 있다. 과일은 과일을 먹게 한 유혹자의 몸과 같은 색이다. 노르스름하면서도 불그스름하다.
그리스 신화의 여신들이 누가 제일 아름다운지를 놓고 경합을 벌이는 장면을 묘사한 스위스 출신 화가 니클라우스 마누엘 도이치의 ‘파리스의 심판’(1517∼1518년)에서 아프로디테가 받는 사과는 위대한 성적 힘을 지닌 상징이다.
여행작가 유연태 씨는 “며칠 전 강원 고성군 거진항에서 생태맑은탕을 먹으면서, 동해안에는 명태 씨가 말라 일본산을 쓰는데 알은 죄다 일본 사람들이 빼놓고 우리에게 수출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제 한국에서도 이 책만 한 수준의 음식문화사 책이 나오면 좋겠다며 수저를 놓았다”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